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Oct 09. 2022

상앙(商鞅)의 변법개혁(變法改革)



B.C 361년 상앙이 조국 위나라를 떠나 진효공을 찾아온다. 이 만남이 진나라가 서쪽 변방의 외진 야만국에서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변방이라는 지리적 취약점을 극복하고 천하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상앙(商鞅)의 변법 개혁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진시황이 B.C 221년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고, 영토와 정치 통일 외에도 화폐, 도량형, 문자 등을 통일하는 소위 삼통(三統)을 단행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진나라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진시황 이전의 여러 군주들과 역량을 갖춘 천하 인재들의 노력이 차곡 차곡 쌓여온 결과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원전 4세기 중반 효공(孝公)과 상앙(商鞅)의 개혁 정치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서부 변방 외진 곳의 존재감도 별로 없던 진나라를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강국으로 만들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목공(穆公)때 흔히 사불문(四不問)으로 불리는 천하 인재 영입을 주도한다. 민족, 국적, 연령, 신분을 따지지 않고 역량만 있다면 등용하였다. 그런데 진목공이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여 위세를 떨친 후로는 진나라가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헌공(獻公) 때 도읍을 역향으로 옮기고 서하 지역을 되찾는 등 중흥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이어받은 군주가 바로 효공이었다. 효공(孝公)은 즉위 이듬해 B.C 361년 적극적으로 천하 인재를 모은다. 진나라의 젊은 군주가 ‘초현령(招賢令)’을 발표하여 천하의 인재를 초빙한다는 것을 듣고, 상앙은 진나라로 가서 총신(寵臣) 경감(景監)을 통해 효공을 만났다.     

          

춘추전국주요제후국형세도(春秋戰國主要諸侯國形勢圖)

    

     

전국 시대 진(秦), 조(赵), 위(魏), 한(韩), 제(齐), 연(燕), 초(楚) 등의 일곱 제후국들, 일명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천하를 놓고 각축을 벌이던 시절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이 지배하던 때였다. 상호 경쟁과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 시대의 모든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변법을 실시했지만, 나라마다 그 상황이 많이 달랐다.  상앙이 변법 개혁을 추진한 진나라가 가장 뛰어났다.     

     

상앙은 원래 위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공손앙(公孫鞅)이었으나, 나중에 진나라에서 상읍 땅을 봉지로 받았다고 하여 상앙이라고 불렸다. 기원전 361년, 위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는 상앙이 뛰어난 인물임을 간파하여  위나라 혜왕(惠王)에게 천거한다. 그러나 혜왕은 그의 비범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공숙좌를 비웃었다. 공숙좌가 보기에 위앙이 나라를 떠나면 타국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여 조국 위나라에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위 혜왕에서 상앙을 천거하든지, 아니면 그를 죽일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위 혜왕은 공숙좌가 병에 들어 제정신이 아닐 것이라고 가볍게 여겨 상앙을 그냥 두게 된다. 공숙좌는 상앙에게 자신이 위혜왕에 말했던 내용을 전하면서 빨리 위나라를 떠나라고 제안한다. 상앙도 공숙좌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상앙이 목숨을 부지하지만, 결국 위나라에 등용도 되지 못했다.                     




병문완을 하러 온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주위를 물리치고 이렇게 아뢰었다.

 “왕께서 상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반드시 죽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왕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王且去, 座屛人言曰 : “王卽不聽用鞅, 必殺之, 無令出境.” 王許諾而去.


왕이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간 뒤, 공숙좌는 상앙을 부른다. 자신이 상앙을 왕에게 추천했고, 왕이 거부하기에 위나라의 훗날 우환을 예방하기 위해 상앙을 제거하라고 권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래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멀리 떠나가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상앙은 왕이 자신을 등용하라는 말도 듣지 않았는데 죽이라는 말을 듣겠느냐며 나라를 떠나지 않고 위나라에서 태연하게 생활한다. 상앙이 배포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저 왕께서 상공의 말씀을 듣고도 저를 쓰지 않았는데, 또 어찌 상공의 말씀을 들어 저를 죽이겠습니까?”

 그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彼王不能用君之言任臣, 又安能用君之言殺臣乎?“ 卒不去.          

     


 결국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이 널리 객경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나라로 왔다. 진시황이 천하 통일 이전에 오랜 세월 다수의 군주가 통일의 터를 닦았다. 진시황 당대에 천하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선대의 여러 군주들이 통일 초석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진효공이 특히 영명하고 실행력이 뛰어난 군주였다. 그리고 상앙이 진나라에 오자마다 곧장 효공에게 발탁된 것은 아니었다. 진나라에 온 지 3년째인 기원전 359년에 등용되어 개혁의 핵심이 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 진나라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놓고 기탄없이 토론을 하였고, 진효공은 상앙의 변법 개혁을 적극 지지한다. 


          


상앙이 내세운 것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전면적인 개혁이었다. 특히 귀족의 특권 폐지와 왕권의 강화, 철저한 신상필벌 등 강력하고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귀족들의 반발은 불을 본 듯 훤했다. 그래서 효공이 머뭇거린다. 상앙이 흔들리는 효공에게 강력하게 간언한다.     

“의심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 의심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지혜를 가진 자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 

              疑行無名,疑事無功。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非於世

                                             상군열전(商君列傳)     

개혁에는 장애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혁파하려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래서 자기 확신과 결단력이 필요하고, 비판과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상앙의 강력한 주장을 듣고 진효공이 설득된다.          

 

그러나 감룡(甘龍)과 두지(杜摯) 등 보수파들의 반대는 예상보다 거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혁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다. 기득권 세력에게는 개혁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누리던 모든 특혜와 권력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멸문지화도 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조정에서 치열한 격론 끝에 기득권 세력들과 논쟁에서 효공이 상앙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이야 군주가 결정하면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고 해도 일반 백성들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려면 어떻게든 백성들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법의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이목지신(移木之信)이 등장한다. 이목지신(移木之信) 나무를 옮기는 믿음을 의미하는데,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상을 주어 믿음을 갖게 하여 남을 속이지 않거나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상앙은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 남쪽에 세우고 백성에게 말했다.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십 금(金)을 주겠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상앙은 상금을 올려 말했다.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오십 금을 주겠다.” 어떤 사람이 반신반의하며 이것을 옮겨 놓자 상앙은 즉시 그에게 오십 금을 주어 나라가 속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새 법령을 온 천하에 알렸다.


이목지신(移木之信)


                    

진효공의 강력한 후원 아래 상앙이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한다. 변법을 통해 개혁을 실행하여 동력이 충분했다. 상앙의 변법 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먼저 1차 변법은 기원전 359년에 실시되었다. 상앙은 1차 변법에서 십오제(什伍制)와 연좌제(連坐制)를 실시했다. 십오제는 진나라의 모든 가구를 5가구, 10가구 단위로 구성한 것으로, 십오의 단위를 기본으로 조세 납부와 병역의 의무를 공동으로 지게 했다. 각 가구가 분리된 것과 달리 일정한 단위로 묶으면 연대 책임을 지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그 안에 소속된 백성들은 그 누구도 게을리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이 십오제의 강력한 효과는 연좌제에 있었다. 만약 십오 내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죄를 진 자나 그 가구의 책임은 당연하고, 그가 소속된 십오가 똑같은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범죄자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에게는 극도로 잔인한 요참형(腰斬刑)에 처한다. 작두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었다. 나아가 누군가 범죄자를 고발하면 상을 주는 엄격한 신상필벌을 실행하였다. 이렇게 되면 진나라 사회 전체가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등 극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귀족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을까. 상앙은 기존 귀족들의 세습 특권을 없애고 군공(軍功)에 따라 작위를 결정한다.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공에 따라 작위를 준다는 것이다. 그 작위에 따라 정치적 특권,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리도록 했다. 귀족들은 이전까지 국가에 대한 기여 여부와 관계 없이 작위를 세습하고, 막대한 농토, 그리고 노비들을 소유하여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런데 상앙은 그러한 귀족들의 기득권을 철저히 혁파해버린다. 그래서 기존의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 작위를 20등급으로 세분해 확대한 20등작제를 실시했다. 철저하게 실적 위주의 체제를 적용하였다.      

     

     

전국시대 각국의 변법 상황


그리고 20등작제에는 여자, 범죄자, 미성년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백성을 포함시켰다. 실질적으로 높은 지위는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20등작제에서는 귀족일지라도 군공이 없으면 작위를 박탈하고 토지를 회수했다. 기존의 체제에 익숙했던 귀족들에게는 상앙의 변법개혁이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급진적인 사회 변혁 시도였다. 한편 누구든 전쟁에서 군공을 세우면 그 정도에 따라 작위를 하사했다.               




여기엔 귀족과 백성의 차이도 없다. 오직 전쟁터에서 공을 세웠느냐 아니냐가 관건이었다. 군공에 따라 받은 작위에 따라 토지와 집, 노비의 수, 옷의 종류 등에 차등을 두었다. 귀족들과 백성들이 상앙의 변법 개혁 정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귀족들은 군공을 세워야 한다는 중압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반 백성들은 전쟁터에서 군공을 세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전하고 승리하기 위해 몸도 사리지 않게 된다. 귀족들의 기득권을 철저하게 파괴하기 위한 제도 개혁을 실행한다. 상앙의 개혁의 하이라이트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상앙 정도의 뛰어난 개혁가가 있어서 귀족들의 기득권을 혁파했다면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필자만의 생각일까.     

          


거열범인위앙(車裂犯人衛鞅) -위앙 즉 상앙이 거열형을 당하는 장면의 그림이다.



     

           

상앙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2차 변법 개혁을 실행한다. 원전 350년, 이번에는 군현제로서 절대 군주의 명령이 원할하게 전달되게끔 하는 제도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을 통해, 각지의 향과 읍을 현으로 통합하여 진나라 전국에 31개의 현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는 중앙에서 각 현에 파견했다. 따라서 군주가 각 지방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가구에 성인 남성 2명이 있을 경우 2배의 세를 부담한다', '부자와 형제가 한집에 함께 사는 것을 금한다' 등의 법령을 제정한다. 가구 수의 확대를 모색하여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외에도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토지 제도, 즉 수전제를 시행하여,  재정의 안정적인 확충과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더불어 납세의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량형을 통일시켰으며, 법가 이론으로 사상을 단일화했다.     

     

상앙이 주도한 20여 년간의 진나라 개혁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태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시범 효과를 노려 처벌을 시도한 것이 결국 상앙의 비참한 최후를 불러오게 된다. 태자를 직접 처벌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태자의 스승 즉 태부(太傅) 공자 건(虔)을 코를 베는 형벌인 의형(劓刑)에 처하고, 태자의 교관 공손가(公孫賈)를 얼굴에 먹을 뜨는 형벌인 묵형(墨刑, 경형(黥刑)에 처하자, 그 뒤로 왕족이건 백성이든 어기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태자조차 처벌 대상이 되었으니 그밖의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없었다.      



“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法之不行, 自上犯之.     



하지만 이 부분에서 상앙의 정무적 감각이 떨어졌다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차기 제위에 등극할 태자를 처벌하려 하다니. 적당한 경고에서 그쳐야 했다. 그리고 너무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개혁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혁파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지위를 세습하고 특권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나라 전체를 철저한 법치주의로 이끌었던 상앙이 그 법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 기원전 338년 상앙의 최대 지지자였던 효공이 죽었다. 그러자 상앙은 단번에 권력 기반을 잃었다. 효공에 이어 군주가 된 태자와 구 귀족들이 상앙을 단단히 벼른다. 정적 처리는 지금이나 고대 시대나 별반 차이가 없다. 없는 죄도 만들어 덮어씌우면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랬다. 진나라를 천하의 강국으로 만들고 중원을 호령하게끔 설계한 상앙이 이젠 집권 세력의 제일 표적이 되어 버린다. 상앙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쓴 뒤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곧 잡혀와 사지육신을 찢어죽이는 거열형(車裂刑)으로 극형을 당한다. 그런데 상앙은 죽었다고 해서 그 변법개혁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혜문왕을 비롯한 후대 군주들이 상앙의 변법 개혁에 따른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 그렇게 하여 중국 서쪽의 약소국이었던 진나라는 전국 시대 최강국이 되었고, 약 100여 년 후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룩했다.      

     

개혁가 상앙이 비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그가 주도하고 진효공이 강력하게 후원한 전면적인 변법 개혁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과연 병역 의무를 비롯한 국가에 대한 기여를 제대로 했는지도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가 평등한 민주국가라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경제적 계층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국가 정책도 일반 국민들이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기득권을 혁파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이 과연 가능할까도 생각해 본다. 시장논리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기득권 체제의 불법과 반칙을 제거하고, 그들의 특권을 박탈하여 불평등을 해소하는 개혁이 가능할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상앙의 변법 개혁은 기원전 4세기로 지금으로부터 2500여 전에 행해진 역사적 사실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전 02화 화식열전(貨殖列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