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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pr 25. 2023

들판에 서서

보슬비가 곱게 내리는 들판 아득히 펼쳐진 보리밭이 곱게 곱게 들어옵니다. 지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봄비속에 청량한 바람을 가만히 품고 서서 저를 바라봅니다. 아무도 없는 보리밭 사잇길을 홀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감자밭도 보이고 연초록 둑길도 추억속으로 저를 이끌고 갑니다. 


봄비가 우산 끝으로 타고내립니다. 혼자 이곳까지 와서 아득한 어린 시절 그때를 생각하면서 문득 사라져 버린 사람들 얼굴을 떠올립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크게 아프거나 고생을 한 적이 없어서 제 삶이 그 누구보다 평탄하고 행복하였노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들판에 홀로 서서 가만히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허전함과 쓸쓸함으로 빠져듭니다. 


보리 잎새마다 곱게 내린 봄비가 맺힙니다. 강바람이 둑길을 넘어 보리밭 들판에 내려와 앉았습니다. 보드라운 봄비와 바람이 아름다운 심포니가 되어 저를 감싸주는 듯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 아득한 보리밭 들길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듯합니다. 


중학교 3학년 봄날 혼자 쟁기를 지게에 지고 소를 끌고 가서 1300평 논을 갈아 엎었습니다. 혼자 하루 종일 쟁기질을 하던 저에게 동네 아지매 아재들이 지나가다 칭찬도 하였지만 저는 그야말로 무심의 경지로 소를 끌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해본 적도 별로 없고 그냥 시키는 대로 일만 하던 그야말로 소띠 그 자체였지요. 부모님과 형은 다른 곳에서 일을 열심히 하였을 테고. 


고1때 여름방학 때 수박밭에서 서로 눈이 맞았던 이웃학교 여고생의 청순한 하늘색 리본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부모님 수박 농삿일을 도와드린다고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며칠 간 수박밭 원두막을 지키다가 동네 후배들 앞에서 마주 섰던 그 여학생과의 만남, 난생 처음 이성을 만나 사람들 앞에서 하늘이 노래졌지요. 정확히 30년 뒤 참으로 우연히도 대구에서 마주쳤던 날 누군가 그랬지요. '첫사랑 추억은 기억에만 남겨 놓으라고'


대학시험에 합격하던 해 겨울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골친구들과 낙동강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건네 주던 막걸리를 너무 많이 받아 마셔서 걷는 걸음마다 움푹 움푹 빠지는 느낌도, 그렇게 강물을 바라보며 걸어 정신을 차리려 하면 친구들이 강물 쪽으로 밀어넣으려 장난을 칩니다. 저는 버티고 그렇게 강물 위로 우리들 폭소가 솟아올랐습니다. 


오실 나루터에 도착하여 뱃사공에게 단체로 나란히 서서 쑥떡을 먹이다가 분노한 뱃사공의 추격을 받고 끝없이 도망치며 달리던 그 들판도 생각납니다. 노를 젓는 배가 유턴도 할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고 뱃사공이 화가 나며 노를 뜯어 들고 휘휘 저으며 무섭게 달려 올 수 있음도 알았지요. 뱃사공이 벙어리였단 사실을 뒤에 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훗날 40대가 되어 그곳을 찾아 사과하려 했지만, 나루터도 없어지고 뱃사공도 벌써 제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더군요.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그곳으로 몰려가서 하루 종일 기마전, 닭싸움 그것도 지치면 수박을 마음껏 먹다가 낙동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물장구쳤던 기억도 봄비 속에 살며시 다가옵니다. 동네 지지배들이 지켜보면 좀 잘 보이려고 격렬하게 벌이던 기마전 누구는 코에서 피가 터지고, 또 누구는 발가락이 밟혀 비명을 질렀지요. 그러면 동네 여자애들이 너무 좋아하면서 크게 박수를 치고.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 마을을 찾았을 때, 耳順 대열에 올라서도 스스로는 그 나이를 생각지도 못한 채 마을 동구밖에서 만난 어느 아재가 저를 만나 제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면서 똑 같은 질문을 연이어 세 번이나 하던 순간 저는 인생의 뒤안길도 생각하게 되었지요. 



둑길에 올라 섰습니다. 내리는 봄비를 태운 채 강물이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연초록 둑길 위로 봄비가 내리면서 마른 대지를 가늘게 적십니다. 흙길이 연초록으로 바뀌어 갑니다. 나이를 먹으면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살고 싶었습니다. 오늘 같이 봄비가 내리면 홀로 들길을 걸으면서 제 삶을 편안히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도회지의 번다한 삶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시골 생활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강물과 만나는 지천 물길 위에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들길을 걷다가 집으로 조용히 돌아와 밤새 읽다가 만 책을 펼쳐 보고 싶었습니다. 방문을 열어놓고 벽에 기대 앉아 봄비 내리는 시골 풍경에 가득 가득 젖고 싶었습니다. 세상살이에 특별한 목적도 없고 흘러가는 세월에 몸을 그냥 실었으면 하였지요. 그런데.......




오늘 봄비 오는 보리밭 들판에 홀로 서서 제 삶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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