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지인이 몇 년만에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저도 그 지인의 전화를 기다렸던가 봅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전화를 했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미안함이 살짝 생겼지요. 그리고 그렇게 지인의 근황을 죽 들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긴 세월 많이 아팠던가 봅니다. 집인지 병원인지는 구체적으로 듣진 않았지만 몇 년 간 가족 간호하면서 지친 듯한 목소리가 짠하게 느껴집니다. 월요일이면 평소에 연락이 뜸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드리면서 안부를 확인하긴 하는데 지금 이 지인은 꽤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또는 조금은 톤이 조금 올라간 목소리로 털어놓습니다.
요즘엔 제가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전화 통화하는 상대방에게서 주위 사람들이 아프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거나 아니면 너무나 가슴 아픈 이별을 했던 사례를 많이 듣게 됩니다. 진짜 친했던 친구와 영원히 헤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네 삶의 덧없음을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젊은 날에는 그저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옆도 보지 않고 그냥 열심히 살았기에 누군가 아프다거나 누군가 세상을 버리셨다는 소식은 윗 세대에 해당하는 사항이라 여기고 가볍게 보았지요. 어쩌다 우리 나이 대에 누군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면 특별한 뉴스거리가 되었지만 지금 이 나이엔 그런 일들이 평범한 일상사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저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영향인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의 죽음도 그리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홍자성이 지은 채근담 후집에 아래 내용이 나옵니다.
知成之必敗(지성지필패)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면,
則求成之心(즉구성지심) 不必太堅(불필태견)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치게 굳세지 않을 것이고
知生之必死(지생지필사)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
則保生之道(즉보생지도) 不必過勞(불필과로)
삶을 보전하는 길에 지나치게 애쓰지 않을 것이다.
요즘 와서 죽음에 관해 새삼스레 담담해집니다. 진짜 이 세상과 이별할 때 지금의 제 마음이 오롯이 그대로 변하지 않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삶에 대해 집착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즐겁게 살아갈까 합니다. 언젠가는 가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삶에 대해 그리 집착할 일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아내와 우리 아이들 3남매를 두고 가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한 고통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별해야 할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가족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하려 합니다.
그리고 전화 통화 중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있지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전화 통화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 깊이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몸이 불편하면 전화 한 통화도 귀찮을 정도로 만사가 귀찮게 됩니다. 제대로 서거나 앉고 거동하는 것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노년 세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에 비해 우린 진짜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겁니다."
제가 너무 감상적일까요. 마침 대안학교 창문 너머로 빗물이 부드럽게 날리고 있습니다. 잠깐 여유를 갖고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글을 전개합니다.
그래서 지인들과 만날 때면 모임 그 순간이 매주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만날 때마다 이 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자꾸 반복하여 말하는 것도 뭣해서 그냥 제 마음 속으로만 그렇게 말을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