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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07. 2024

그만한 일로 흥분하실 건가요

퇴직하고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젊은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규칙적인 삶과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료들과 하루를 마감하는 의미로 술잔이라도 기울이거나 귀가하여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냈지요. 누군가 정해 놓은 일정에 그냥 몸만 따라가면 되는 수동적인 life style이라고나 할까요. 각자 하고픈 취미 활동을 하는 저녁 시간도 있었겠지요. 어쩌다 직원 회식 시간에는 초저녁에 집에 가면 재앙이라는 둥, 부인이 놀란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들먹이며 2차, 3차에 입가심 핑계로 또 한 잔 그렇게 새벽이 되면 포장마차에서 속을 달랜다면서 우동까지 먹고 집에 들어갔던 날도 생각나네요.


요즘엔 모임에 가도 많이 가야 저녁 식사 후 가까운 맥주집에서 2차로 가볍게 한 잔 더 하고 귀가할 정도네요. 밤 8시 30분만 넘어가면 슬슬 눈이 감기고 급기야 맥주집에서 잠들기도 하는 진짜 노년 세대의 삶이 되었네요. 젊은 날 그 혈기 왕성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이젠 앞에 앉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귀찮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상대방 말 중에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 격렬한 언쟁도 했는데, 이젠 노쇠한 탓인지 그런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진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실감됩니다. 그래서 2차 도중에 짐을 챙겨 일어서면서 "도저히 잠이 와서 안 되겠습니다. 먼저 갑니다."라고 말하면 합석한 분들이 대부분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 봅니다. 어디 아픈 데 있느냐.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냐. 세상 일에 의욕이 떨어지나, 부부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나. 나이 들어 이것도 못 견딜 만큼 약해졌나 등등 순식간에 온갖 질문이 쏟아집니다. 저를 마구 놀립니다. 그래도 기어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릅니다. 뒤통수가 간질 간질 해도 어쩔 수 없지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다른 이들이 먼저 일어서면 제가 나서서 다시 자리에 앉혀 술을 강요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들도 저에게 그런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무리하게 잡아 술잔을 건넸던 그 선배님들께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저도 많이 반성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진짜 잠이 와서 돌아옵니다. 집에 도착하여 아파트 주차장을 걸으면서 시원한 밤바람에 잠도 깨고 기분도 상쾌해집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내가 TV를 보다 말고 시계를 보면서 왜 이리 일찍 왔을까 하면서 환하게 웃으며 반겨 줍니다. 아내가 밝은 얼굴로 맞아주니 그 새 기분도 좋아집니다. 밤 9시도 안 되어 돌아오니 신기했던가 봅니다. 집에 와서 곧장 샤워하고 잠을 자려 하는데 막상 책상 앞에 앉으니 잠도 오지 않네요. 그래서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칩니다.


책을 펼쳤다가 문득 동문 모임 자리에서 누군가의 장황한 신세 타령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제가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임에 오랜만에 참여하여 기분이 울컥했는지 몰라도 오래 전에 있었던 진짜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또 반복하여 길게 말하지 옆에 있던 저와 몇 사람이 괜히 불편했지요. 우리의 관심 사항과는 전혀 먼 가정 내 부부 간의 갈등 문제를 우리들 앞에서 털어놓으며 넋두리하는 그 선배님을 보면서 저도 한마디 하면서 제지할까 고민하는데 저보다 더 성질이 급한 후배 한 명이 그 선배의 말을 완곡하게 제지하더군요.


"형님, 뭘 그런 사정으로 흥분하십니까. 오랜만에 우리들 만났으면 지금부터라도 좋은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로 술을 마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인제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조금 섭섭한 일이 있어도 너그럽게 받아주고 웬만한 문제는 대충 덮고 넘어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은 우리 후배들 인생 상담도 좀 해주고 형님 말씀은 그 정도에서 잠깐 멈추심이 어떨지요."


그제서야 그 선배님도 "아치, 내가 오늘 말이 좀 많았제. 미안. 이제부턴 입을 다물겠다. 하하. 미안해. 후배들 말을 많이 들어야 하는데 선배가 되가 주책도 없이 미안하네."


다행히도 그 선배가 후배의 말을 적절하게 수용하여 분위기가 부드럽게 넘어가는가 했는데, 또 이어지는 선배님의 다른 이야기가 저를 불편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잠이 오는데다가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슬며서 일어섰지요. 물론 끝까지 장황한 선배님의 말씀 때문에 집에 일찍 간다는 말은 결코 못 했습니다. 그냥 잠이 온다는 핑계만 대면서 떠나왔을 뿐입니다.


요즘 각 모임 분위기는 예전과 많이 다릅니다. 오프라인 모임이 매우 위축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영향일까요. 아니면 스마트 폰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문제는 해결된 덕분일까요. 개인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해져서 공동체 같은 모임을 피하는 것일까요. 그래도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한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라"고 많이 하지요. 지갑을 여는 것과 입을 다무는 것 둘 중에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 할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 그렇게 말합니다. 지갑도 열고, 입은 다물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말하고 싶은데 입을 다물라고 하면 그건 진짜 고통이 됩니다. 물론 남의 말을 방해하면서까지 말을 많이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과묵한 것도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선배님 만나면 말할 기회를 많이 드리고 싶습니다. "그만한 일로 흥분하실 건가요"라고 공박할 것이 아니라 선배님의 넋두리를 충분히 들어주는 여유를 갖고 싶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으며 하소연이라도 할 때 "입을 다물라"라는 말을 들으면 매우 슬플 듯합니다. 이젠 저도 나이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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