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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May 18. 2023

봄비 강변 우산 속에서

봄비 내리는 저녁 어스름을 따라 강변을 걸어갑니다. 풀잎에 곱게 맺힌 빗물이 살며시 떨어지다 맺히고 다시 떨어집니다. 여린 빗물을 지탱하려고 애쓰는 풀잎새의 몸짓이 바람결에 흔들립니다. 고개를 들어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내 긴 긴 삶에 수없이 많이 보았을 봄비인데 오늘따라 전혀 새롭게 곁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강변 둑길엔 고요함만 내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저쯤에서 걸어올 법한데, 거짓말처럼 강변에는 우산을 쓰고 홀로 걸어가는 저만 있습니다. 이젠 치열한 삶 속에서 부대끼는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간이 정지된 듯한 강변 둑길을 천천히 걸으며 흐르는 강물도 함께 바라봅니다. 


가끔은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낙향하여 은거하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사라져 가고 싶었습니다.  지천과 본류가 만나는 갈대밭 근처 새벽 안개가 살며시 솟아올라 가는 풀밭에 서서 하염없이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세월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건 현직에서 오랜 기간 가졌던 꿈이자 노후의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스스로도 주위에도 약속헸었지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처럼 거대한 담론을 끌고 가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점처럼 참으로 미약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나로서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오늘처럼 빗물이 풀잎마다 맺히는 순간이 제 인생 여정의 편린처럼 보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참으로 편안하고 여유롭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도시가 아닌 시골 아주 깊은 곳에 들어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되는 그런 삶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진하게 배어 있는 강변 둑길은 언제나 저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잎을 보자마자 급속하게 어린 시절 추억의 공간으로 달려가지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지만 몸서리치도록 그리운 그곳에 어린 제가 서 있습니다. 


꿈처럼 시골로 들어간다면 책에 둘러쌓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었습니다. 이젠 인생 목표가 새삼스러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루 하루 건강하고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되지 하는 어쪄면 자포자기에 가까운 여생이 될 듯합니다.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늘 꿈꾸고 살았던 일이 눈앞에 일어나길 빌어봅니다. 책임 의식에서 벗어나 훨훨 자유로운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강요한 책임과 부담을 언젠가 말끔히 벗어내고 오늘 같이 조용한 들길에서 우산을 들고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꿈을 그립니다. 


한때는 제가 자란 고향 마을로 돌아가 아직도 살아계신 동네 형님들, 아재들과 더불어 시골 냄새를 맡으며 세월을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  시골 마을 예전에 우리 가족들이 오손도손 살던 그곳은 누군가가 집을 허물어 나대지로 만들어 조금이라도 돈 될 일만 찾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시골 마을 한쪽 구석에 근거를 마련해서 사는 방식도 떠올렸지요. 노동에서 벗어난 노후 시간이기에 일찍 일어나는 날 아침 새벽이면 어린 시절 숱하게 걸었던 농로를 따라 옛날 우리 가족들이 일하는 밭으로 가서 추억을 떠올리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까도 햇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자꾸 부대끼고 살면 또 다른 갈등이 생기게 되겠지요.  


시골의 밤 풍경은 도시보다 훨씬 짙고 어둡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들길엔 시간이 아예 정지된 듯합니다. 봄비를 맞은 이름 모를 풀잎만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참으로 무상한 인생입니다. 깊어가는 봄 밤 속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낯익은 이 하나 없는 시골 여관 2층의 고요를 반추합니다. 들길에서 돌아와 방 한 구석에서 낮에 읽다 만 책을 다시 펼칩니다. 소반엔 맥주 캔이  나란히 서 있고 총기를 잃은 형광등 불빛이 지면으로 떨어집니다. 한 때는 곁에 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처럼 봄비가 곱게 내리는 밤엔 홀로 정적을 느끼면 젖어드는 일도 좋은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꿈꾸었던 미래 노후 삶이 떠오릅니다. 


"작은 시냇물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들길에 호박꽃이 물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름날 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들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이름없는 풀꽃들이 우리 둘을 향해 고운 미소를 보내옵니다. 걷다가 조금이라도 지치면 조용한 집으로 돌아와 포근한 이불 위에 마주 앉아 바라봅니다. 마당에 머물렀던 달빛이 마루를 따라와 같이 앉았습니다. 달빛이 방문을 열기 전에 조금은 어설픈 기타 연주로 추억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소를 띤 채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착하고 둥근 얼굴이 유난히 포근합니다. 가끔 함께 부르는 노래 속에 보름달 빛이 창문 너머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랑의 기운이 늘 스며드는 사람과 함께 시냇물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을 누리며 사랑하는 그대 손길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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