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진급/직원은 내 사람/고마운 분들
20화. 실패로 본 성공 비법ㅡ대기업 편
■ 서글픈 진급
ㅡㅡ1991년 대리 진급
입사 만 3년. 진급 연한 4년인데 1년 일찍. 그해 럭키소재가 럭키로 합병 당한다. 럭키 그룹 차원에서. 합병의 원칙. 소재는 진급 안 돼. 럭키 인사 적체라서. 예외 나만 단독 진급. 나 국내 유일무이 EDC 수입 전문가. 사업부 셋. 실리콘웨이퍼 사업부, 카본블랙 사업부, 나 소속 VCM 사업부. 합병의 주된 이유인 VCM의 원료가 EDC
헌데 소재 발칵 뒤집혀. 웨이퍼, 카본블랙 두 사업부에서 강한 반발. 왜 막내 시균이만? 우리도 진급 연한 찬 대상 있어. 대리, 과장, 부장 진급 아무도 못 하는데 왜 시균이만? 것도 조기 승진. 그날 종일 회사가 시끌시끌
시균이 너 기분 째졌겠다. 아니, 서글펐어. 소재 마지막 임원 회의. 사장, 전무, 이사, 재무 이사. 거기서 나만 진급 시키기로 땅땅땅. 부장님이 기뻐하며 회의 종료 직후 전하길래 감사하다고 했어. 속으로 왜 나만? 하지만 느닷없이 합병이라니. 진급이 이리 어려운 거였어? 나 하나로 이 난리 부르스? 대리 반납해야 하나? 이날 난 대기업에서 내 회사는 씹어 먹는 오징어 다리 한입거리, 임직원은 거기 붙은 빨대라는 걸 느꼈어. 진급의 기쁨은커녕 처음 대기업의 비애를 품었어
어쩔수 없는 것이 애초 그룹의 큰 그림이었지. 럭키는 PVC 원료 생산. 그 원료 VCM을 전량 수입했는데 생산 공장 짓기로. 여수화학단지에 부지를 가진 대성메탄올이라는 회사를 샀어. 그리고 사명을 럭키소재로 정하고 VCM 공장을 짓기로. 그 프로젝트에 경력 및 신입 모집. 거기에 나 막내로 투입. 공장 건설 끝나면서 우리 회사를 럭키가 흡수. VCM의 원료 EDC는 국내 처음 수입이었고 그걸 내가 맡은 거. 시키지 않은 걸 스스로 알아서 파고들었고 독보가 되었던 거. 같이 합병 당한 다른 회사 하나 더 있는데 같은 이유와 과정. 그 회사는 원료 수입을 과장, 사원 둘이서 했고 역시나 진급 금지 원칙
ㅡㅡ1995년 과장 진급
대리 진급 만 4년. 진급 연한 4년 꽉 채우고. 너 성공한 거야. 글쎄, 마켓쉐어 만년 2위를 단박에 1위로 끌어올렸는데? 그거 그대로 따라만 해도 전국 쉐어 1위 등극인데? 너 회사 바꿔서 원주 지원했대매? 그러게. 굴러온 돌이 제때 진급한 거만도 고맙지
헌데 차장 직급이 새로 생겼어. 4년 더 해야 부장 돼. 그게 뭐? 오래 일하면 좋지. 아니, 나 50세 전에 사장 목표로 입사했거든. 대리 1년 일찍 진급하는데 회사가 난리 나고, 사업 통째로 1위로 만들 마케팅은 쓰레기통에 처박고. 차장 4년 장애물 세우고. 언제 사장 되고, 사장 된들 세계 1위 도약 시킨들 무슨 의미? 너가 이상한 거야. 맞어. 그래서 과장 2년 하고 회사 10년 때려쳤어
■ 직원은 내 사람
나 지휘관. 부하 직원은 내 손과 내 발. 나는 머리. 손발을 자유자재로 쓰려면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나부터 정성 쏟는다. 업무 지시는 명확하게. 목적부터 왜 이유까지 상세. 수행에 어려움 없는지, 지원 필요한지. 특히 여직원 생리면 휴일이나 휴식. 결과 칭찬
예외
나 신입으로 입사. 회사에 사무 여직원 단 한 명. 유능하다. 업무 처리 속도 매우 빠르다. 업무 둘. 문서 작성, 커피 타기
나 혼자 셋 분량 업무. 여직원에게 문서 작성 부탁. 나보고 하란다. 거래처 외국인 어쩌다 방문. 커피 부탁. 못 한다고. 바쁘다고
맞다. 바쁘다. 근데 나 그거까지 할 시간 없다. 매일 8시 출근, 야근에 토도 저녁까지 일도 출근 잦다. 녀는 정시 칼 출퇴근, 휴일 꼬박 찾아먹고. 잘못한 건 없다. 허나 비싼 임금 내가 문서 작성? 서툴러 시간도 대여섯 배. 근본. 회사의 목적 이윤 창출, 그를 위해 효율에 위배. 부장에게 보고하니 둘이서 해결하란다
일주일 녀 업무 목록표 작성. 세세하게 모든 행위 하나부터 열까지 업무 우선 순위에 따라서, 출근부터 퇴근까지. A4 한 장. 아울러 내 거도 작성. 똑같이 정밀하게 A4 한 장
녀와 면담 요청. A4 두 장을 테이블 위에 내민다. 이게 뭐냐고. 녀 업무, 내 업무다. 이걸 왜 주냐고? 부장님이 둘이서 알아서 해결하라 했다고. 내일부터 업무 완전히 바꿔서 하자고. 바꿀 건지, 내 업무 지시 따를 건지 알아서 하라고. 한참 들여다 보더니 달기똥 눈물 뚝뚝뚝
가엽다. 어쩔 수 없다. 사건 있었다고 들었다. 고참 평직원이 커피 타는 탕비실서 사무 여직원 구타. 그리고 퇴사했다고. 나도 그럴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여직원 하나 더 뽑을 권한 내게 없다. 채용할 정도 아니다
시키는대로 하겠단다. 부탁 아니라 업무 지시라고 못 박는다. 알겠다고. 나는 고맙다고, 열심인 거 안다고. 그날 그 시간 이후로 문서 작성 내 거부터 해주더라. 간단한 건 내가. 커피 서빙은 외국인 올 때만 부탁했다. 그녀는 사무직원으로 출중했다
■ 고마운 분들
김덕수 과장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상무님으로 퇴직하지만 제겐 영원히 김 과장이십니다. D. S. Kim 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럭키가 럭키소재, 럭키유화와 에틸렌 공동 구매. 그때 처음 뵈었지요. 합병 일 년전부터 럭키 사무실서 병행 근무했었죠. 조상대 대리, 최영호 사원 그리고 저 셋이 한 팀. 과장님이 리더. 얼마나 반가웠는지. 혼자 고군분투 3년. 처음 경험 많은 과장님 모시고 배우면서 팀으로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어요.
함께 한 술자리와 강남 나이트클럽 셀 수 없지요. 영호 고향집 방문해서 토종닭 먹던 기억이 선합니다. 어찌나 질긴지 쇠젓가락으로 다릿살 찔러도 휘었어요. 그뿐인가요. 저 원주로 옮기고 나서도 구매팀 직원들과 원주 오셔서 개울가서 고기 구우며 술잔 기울이고. 그뿐인가요. 저 퇴사하고 새천년 벤처 사업. 사업 국제화 위해 홍콩 갔을 때 홍콩 지사장이셨죠. 서은석 사장 소개해 주셔서 현지 거래선 구축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 주시고. 세계를 품어 보려는 제 큰 뜻 독려해 주시고요. 과장님은 제 은인이십니다. 그후 사업 실패해 10억 빚 갚느라 10년 세월. 소식이 끊겼지만 그 시절 과장님이 베푼 너른 아량과 큰 도움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 즐겁고 귀한 시간 소중히 간직합니다
존경합니다
ㅡㅡㅡ
이현경 부장님,
63빌딩 11층 럭키소재서 신입으로 만났지요. 당시 VCM 공장 건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지요. 건설 자재 구매, 수입. 정력적으로 일 하시던 부장님. 저는 원료 수입이라 업무가 달랐지만 부장님 늘 웃는 얼굴 또렷이 떠오릅니다. 마지막 임원회의 직후. 복도에서 기쁜 마음으로 저에게 대리 진급 소식 전해주셨어요. 그 장면이 진합니다
여수 공장 구매부로 발령나서 근무하실 때. 저 출장 가면 늘 환대해 주셨지요. 다음날 아침이면 항상 부장님 숙소. 전날 저녁 회식에 저 술 먹다 뻗으면 차에 싣고 데려다 재운 거. 필림 끊겼는데 그때 실수가 없었는지 35년 지난 지금에야 불안합니다. 그래도 뭐 우리 부장님 마음 넓으신 거!아니까요ㅎㅎㅎ
고맙습니다
ㅡㅡㅡ
소재 부장님,
죄송합니다. 신입이 못돼 먹은 겁니다. 제가 박아도 끝까지 화 한 번 안 내시고. 여러가지로 입장이 곤혹했을 겁니다. 저도 난감했으니끼요. 부장님, 대인배이신 거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너무 급박하게 진행 되는 과정에서 해프닝이었던 겁니다
무례했던 거 죄송합니다
ㅡㅡㅡ
김O희님,
눈물 흘리게 한 거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정말 바빴잖아요. 문서 작성 자판 치는 거 보면 신의 경지였어요. 월급 두 배여도 부족했어요. 거기다 제 거까지 엎은 제가 나쁜 놈입니다. 헌데 이O석씨와 결혼. 깜놀이었죠. 아니, 그 바쁜 와중에 사내 연애이라니. 매일 두 분 봤어도 전혀 눈치 못 했어요. 둘이 저 엄청 욕했을 거 상상해 봅니다. 괜찮아요. 그리라도 풀었다면야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청춘의 O희씨는 아름다웠어요
여전하실 겁니다
ㅡㅡㅡ
회사 다닐 때 제가 아는 모든 분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