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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Aug 06. 2024

아들인 이유

37화. 응답하라 1968-가족 편


혼인의 목적은 아들이었다. 대를 이어야 했다. 혼인 후 목표도 아들이었다. 동네는 누가 먼저 아들 낳나, 누가 많이 아들 낳나 경쟁이었다. 늙어서 부양하, 죽어서 제삿상 차려주는 건 아들이었다. 딸은 시집 가집 사람될 남이었다.


자식은 평균 여섯을 보았다. 이삼 년 터울. 년생이 아닌 건 여자도 일을 해야 해서다. 아이 여섯 낳고 키우는 건 기본. 애 갖고, 다음 해 낳아 기르며 몸 추스리고, 그 다음 해 다시 애 갖고, 두 해 건너뛴 건 아이 갖는 걸 피해서 아니었다. 남이고 여고 임신 않는 방법을 몰랐고 도구도 없었다. 아이를 떼는 수단은 있었으나 어설펐다. 혼인 외에 출산은 아이는 물론 어미에게도 재앙이었다. 여자 일자리라곤 부잣집 식모가 유일했다. 숙식. 애 딸려 입이 둘인 식모를 둘 바보는 없다. 수단이고 방법이고 가리지 않고 뱃속 아이를 지워야 했다. 독약 같은 걸 먹거나 긁어내거나. 약이 안 듣거나 아이가 이겨냈거나 너무 자라서 죽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 갓 태어난 아이를 포대기에 싼다. 자식 없는 집 문 앞에 둔다.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숨을 거두는 아기도 있었지만 그 아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묻었는지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부나 모 외에는 알 수 없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는 혼인해 낳았어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  아이를 달라붙어 돌보려면 나머지 다섯 배를 곯아야 하기에. 국민학교 간 아이들은 커다란 공동 변소. 죽은 아기가 그런 데 묻혀 있을 거라 무서웠다.


아부지는 고등학생 때 혼인했다. 할아버지가 강제했다. 혼인 날 처음 만난다. 너무 못나서 더 싫었다. 신방에 들어서 곁을 줄 수 없었다. 가출. 여자는 제 집으로 돌아갔다. 육이오전쟁이 났다. 고향 대전에서 서울로. 두 살 연상의 여자에게 구애한다. 미군 부대 식당에서 함께 일하다 자연스레 알게 된 거. 조건이 나은 영어 통역관을 제끼고 여자의 마음을 얻었다. 청춘의 사랑은 혼인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를 잇자는 목적 아니었다.


엄마는 일곱을 낳았다. 1953년 23살부터 1969년 39세까지 16년간 하나씩 태어났다. 첫째. 아부지는 아들을 기대했다. 딸일 수도 있지만 아니겠지. 엄마도 아부지와 같았다. 다른 건 혹시 딸이면 어떡하지 걱정. 응애 응애. 고추가 아니었다. 실망. 게다가 사내아이 같아 못났다. 아둔했다. 아부지는 그런 딸이 싫었다. 엄마는 앞으로 여럿 낳을 거니까 이 애가 우리 도와서 동생들 같이 키우면 된다며 아부지를 달랬다. 둘째. 딸. 병약해 일찍 죽었다. 그 애를 어디에 묻었는지 엄마도 아부지도 말을 않았다. 무슨 병인지 묘가 어딘지 가족 누구도 묻지 않았다. 아부지는 다음은 아들이라 믿었다. 엄마는 기대보다 불안이 앞섰다. 우리집 마주보고 신작로 건너 쌀집이 딸만 일곱 연실 낳은 게 마음에 걸렸다. 셋째. 딸. 그나마 다행인 건 이뻤다. 건강했다. 아부지는 나름 만족했다. 엄마를 사랑했고 애 쑥쑥 잘 낳았다. 네 번째는 아들이라 믿었다. 딸 딸 딸에 또 딸이라니.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고개 절래절래. 설마 가 당할 거라는 건 상상조차 싫었다.


엄마는 딸만 셋 줄줄이 낳고 죄인이 되었다. 아부지는 이번은 아들 맞다고, 만에 하나 딸이면  낳자며 위로했다. 하지만 아들 바라는 마음을 알기에 더 옥죌 뿐이었다. 시내 나갈 때도 동네 사람들 마주칠까 창피해서 골목으로 숨어 다녔다. 쌀집 칠공주가 위안이 되긴 했지만 딸만 낳는 사람은 따로 있나 싶어 초조했다. 혹시라도 옮을까봐 쌀도 다른 동네 가서 샀다. 넷째. 고추라니. 세상에 이보다 이쁜 번데기 고추 없었다. 드디어 사랑 하나만 보고 혼인한 남자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 아들 하나로 죄를 면했을 뿐 아니라 혼인의 목적과 목표를 한꺼번에 이루었다. 남편의 대를 잇고, 늙으면 재산 물려주고 양 받고, 저승 가서도 때 되면 남편 제삿상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세상 가장 소중한 아들이었지만 녀석 외로울까, 한 치 앞을 모르니까 아들 하나만 더 낳기로. 다섯 째 딸, 여섯 째 아들. 마지막 일곱 째 아들은 39세에 보았다. 너무 늦어 부끄러웠지만 아들 셋은 동네에 제일 큰 자랑거리였다. 세 끼니 해결이 쉽지 않지만 어느 집이나 아이 낳는 걸 두려워 않았다. 자기 먹을 건 가지고 태어난다, 아이는 알아서 큰다는 믿음이 있었다. 육이오전쟁의 참상을 겪은 지 오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보다 낫다고 확신했다. 가매기삼거리 어느 집이고 부부는 해 지면 촛불을 켰다. 전기가 처음 들어오고선 백열등. 초든 등이든  들고 아껴 써야 했기에 애들은 일찍 자라고 했다.  끄고 아이들 잠들면 아들 생산 작업에 들어갔다. 긴긴 밤 딱히 할일도 없었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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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 그때는



장남이 노후 대책이었다. 장남이 생명보험, 건강보험, 실손보험, 간병보험이었다. 장남이 국민연금이었다. 이 보험들, 연금 그때는 없었다.


원주시에 병원이 있었지만 위중해도 안 갔다. 치료하는 병, 의사도 매우 제한되었다. 암이 뭔지 모르고, 심장이 갑자기 멈춘 이유는 알 필요 없었다. 벌써 죽었으니까. 수술, 치료, 진단 안 했다. 뇌졸중은 중풍이라 해 집에서 우황청심원 먹거나 한의원 가서 침 맞았다. 살던 집에서 가족 지켜보면서 운명, 거기서 장례. 매장했고 화장은 무연고자만.


상속은 장남 1/4, 배우자 1/4, 나머지 반을 1/n. 나 때 법이 그랬다. 실제는 장남 또는 우자가 다 상속. 법보다 유언을 따랐다. 장남은 부모 양뿐 아니라 동생들 어려우면 도울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 여자는 시집 가면 그쪽 집 사람 되기에 법과 다르게 상속 제외. 부모 부양 의무 당연히 없다. 가난 시대라 장남 올인했고 장남이 부모 노후를 책임졌. 상속이 없어도 의무는 졌다. 장남이 잘못되면 집안이 풍비박산나거나 뒤죽박죽. 




● 그후



엄마, 아부지 바람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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