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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Jun 27. 2024

달팽이 소년

36화. 응답하라 1968-놀이 편


지금 횡성 치마바위에 달팽이 천지래. 그으래? 당장 가자. 달팽이 잡으러. 우렁이는 발꼬락으로 잡아봤다. 달팽이 삶은 거 뒤 깨고 앞 쪽쪽 빨아 여름이면 먹었지만 잡은 적 없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 횡성이 어딘지, 치마바위가 얼마나 먼지는 모른다. 방향은 안다. 가매기삼거리 북신작로다.  달팽이 줍는 거 따위에 준비는 필요 없다. 맨몸뚱이. 꼬맹이 넷은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횡성이 어디야? 치마바위는?


출발할 땐 들떴다. 동네 있어봐야 늘 노는 게 같다. 여름방학이라 학교도 안 간다. 오전반은 학교서 보냈는데 방학이라 아침부터 단짝 넷이 모이니 뭐 하고 놀지 몰라 무작정 길 떠난 거. 사방 100미터 가매기삼거리를 벗어나면 원정이고 모험이었디.


ㅡ서쪽. 배부룽산


시내 가로지르면 만삭 배처럼 불뚝. 두어 해에 한 번. 멀다. 샘물 없어 목 말라. 뱀  많다는데 뱀굴도 보이지 않아 굴 쑤시는 재미마저 없다. 놀 일 영 없으면 남향. 시에서 북쪽 첫 산이 봉산미라면 남쪽 첫 산 배부룽산. 4키로 여.


ㅡ남. 신대리연못


마음이 앞선다. 저수지라 목욕, 진흙뻘이라 우렁이 우글우글. 한 길 넘는다. 수직으로 솟았다 몸무게로 수직으로 내리면 발이 바닥에 닿는다. 떠오르기 전에 빠르게 발가락으로 꾹꾹꾹. 운 좋아 엄지 사이로 끼면 몸 접어 한 마리. 대개는 위치만 확인 후 자맥질. 거꾸로 물속을 헤집고 들어가 손으로 바닥 다시 꾹꾹. 단단하면 우렁이. 서너 번 중 하나는 둥근 돌맹이. 아무리 많다해도 바닥이 우렁이 장판은 아니기에 발 손 꾹꾹꾹. 물놀이 겸 우렁이 잡기. 한 나절 놀다보면 한 무더기. 오갈 때 기찻길 통과는 덤이다. 시내가 철교, 축대인 거와 달라서 여기는 땅바닥에 철로. 해에 잔뜩 달군 쇠와 자갈이라 잠깐이지만 저 멀리 뻥 뚫린 선로에 마음도 뻥. 어디로 가는 걸까? 두어 번 물어도 아무도 답 없다. 가는 길도 연못도 철길도 텃세란 없다. 해마다 두어 번. 허나 멀어서 큰맘 먹어야. 3키로여.


ㅡ북동. 소일연못


장수잠자리 잡으러. 우렁이 한 마리 없으면서 텃세가 드세다. 고등학생, 동네 어른까지 나서는 대사건. 이후로 발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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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동. 치악산 황골


가재 잡으러 딱 한 번. 굿판까지 벌렸으니 다시는 갈 엄두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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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ㅡ



ㅡ삼거리


가매기삼거리는 윗삼거리, 아랫삼거리 둘 사이 100여 미터다. 아랫 삼거리에서 갈라지는 신작로 둘. 남동 신대리연못, 서 배부룽산. 윗삼거리도 갈리는 신작로 둘. 북동으로 소일연못. 동. 도로 뒤편 구루마 길 타고 가면 번재고개 넘어 치악산 황골마을.


ㅡ새동네


그러니까 윗삼거리 북쪽 도로 하나만 못 타본 거. 백 미터 거리 새동네 입구까지는 가봤다. 삼거리 다음이 옻공장. 삼거리도 아니고 새동네도 아니고. 그러기에 둘 다인. 공장 전면이 오십여 미터. 굉장히 길고 크다. 새동네는 두 아저씨와 한 동무로 안다. 휘발류 김씨, 산수 과외 선생님, 그리고 1,2학년 같은 반 동무인 김제일.


과외래봤자 쌀 값 좀 드린다. 하꼬방 방 한 칸에 혼자 사셨다. 군대 갔다와서 그런지 늘 군대 반합에 밥을 짓는다. 반합째 숟가락으로 파서 드신다. 선생님이라 그런지 보리 한 알 안 섞고 새하얀 이팝. 년 배운다. 과외란 게 쌀 아깝다 여겼는지 끝. 동무는 고아였다. 두 살 위. 어리면 가매기삼거리 북단에 자신보육원. 좀 크면 새동네 자활대. 어른용이라 어린애 몸 만한 넝마통을 짊어진다. 시내를 오간다. 팔 만한 건 무엇이고 집게로 집어서 등뒤로 넘겨 담는다. 버리는 양도 적지만 서로 훑어서 돈 되기 쉽지 않다. 안 하느니 낫다. 스스로 활동하는 무리라는 단체 이름. 모아서 팔아 먹는데 보탠다. 휘발류 김씨는 유명했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인근 마을 모든 돼지들의 아버지 격이었다. 그뿐인. 고물상에서 포탄 꽝 터져서 즉사. 좋은 점이 영 없지는 않다. 새동네는 새로 온 사람들이라서 텃세는 없다. 헌데 사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안 간다. 선생님만 새동네 입구라서 잠깐 들렀다. 새동네? 육이오전쟁 나면서 피난민. 새로이 생겨서 새동네. 헌동네도 있겠네?평원동. 기와집 즐비한 부자 동네다. 강원감영 쪽이니 적어도 조선시대.  봉천내가 서와 동으로 헌과 신, 부와 가난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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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ㅡ



ㅡ현충탑


새동네 후딱 지난다. 우로 길 꺾으면 현충탑. 육이오전쟁 때 죽은 군인 아저씨들 혼을 모았다. 해마다 6월 6일 현충일이면 큰 행사. 현충탑 뒷산 너머가 소일고개, 그 우측 산에 화장터, 공동묘지. 나 사는 태장동은 죽은 영혼과 산 사람이 어울려 산다.


현충탑에서 봉천을 만난다. 둑길로 가면 태장2동. 다시 신작로. 북단 좌 1군 사령부, 우 캠프롱 미군부대. 부대가 있으니 시 외곽. 여기까지 집에서 4키로여.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불 붙는다. 지친다. 아침 일찍 먹은 배가 꺼진다. 물도 없어 목 마르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논이다. 끊임없이 논이다. 가도 가도 논이다.


횡성이 어디? 치마바위는 어디?


서로 수없이 물었다. 어쩌다 지나는 군용 트럭, 더 귀한 버스를 세워 물어볼 수도 없고. 달팽이는 물에 살고, 내든 강이든 보여야 물을 찾는데 먼지 풀풀 신작로만 끝없이 이어진다. 달팽이고 뭐고 냇물이든 강물이든 보여야 머리 처박고 물이라도 들이킬 텐데.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대여섯 시간을 걸은 거. 돌아가고 싶다. 너무 멀리왔다는 걸 알기에 그럴 엄두가 안 난다.


앗, 저거닷!


아카시나무 새 순. 몇 가닥 삐죽. 꺾어 껍질 벗겨 먹는다. 달다. 헌데 턱없이 양 적다. 그래도 이거밖에 먹을 게 없다. 평소 정 심심하면 재미로 까먹는 거. 그게 무슨 밥 아니고 먹을 물은 더구나 아니다. 신작로 곁 아카시나무 새순 찾느라 지친 길을 힘낸다. 한여름이라 그마저 드물다. 아카시아꽃 제철 지나 없는데 새순은 무슨. 어쩌다 두엇. 번갈아 가며 나누어 먹는다. 다시 걷고 또 걷는다. 기진맥진. 그나마 해 뉘엿. 땡볕은 피했지만 열기는 여전하다. 탈진. 꼬맹이 넷은 그래도 간다.

횡성? 치마바위? 그 바람도 이젠 버렸다. 되돌아갈 수 없으니 반걸음이라도 나아갈 밖에.


시균아아아, 시균아아, 시균아.


멀리서 누가 부르는 소리. 뒤돌아보니 아부지. 자전거 타고 달려온다. 꿈인가 생시인가. 아부지가 이리 반가운 적은 없다. 첫아들 태어났다고 문 위로 새끼줄에 새빨간 고추, 새카만 숯덩어리 주렁주렁. 고추야, 고추거든. 딸만 셋 본 두려움은 환희로 돌변했다. 젖 떼고 걸으니 그 비싼 자전거 사서 앞에 쇠창살 바구니를 달아맨다. 나 얹어 태우고 동네방네 누빈다.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이거든. 말은 않아도 다들 그런 줄 안다. 그런 장남이 없어진 거. 점심 때가 한참 지났는데 집에 안 온다. 사고 났나? 심장 덜컹. 동네 애들 싹 다 붙들고 물어보니 저쪽으로 넷이 갔다고. 달팽이 잡으러 간다 했다고. 자전거 집어타고 허겁지겁 달려온 거.


횡성 치마바위는 가지도 못 했지만 태어나 가장 먼 길이었다. 그날 이후로 북쪽 길은 다시는 안 다. 횡성은 지구보다 멀어, 치마바위는 치마 닮은 바위일 거야. 백 미터 둘레 가매기 삼거리를 벗어나면  사건, 사고가 따랐다.


1968년 경. 꼬맹이 때. 그땐 그랬다.



잊히기 전에, 더 늦기 전에 1968년 전후 생활상을 서투나마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국민학교 입학 전후 꼬맹이 눈으로, 가급적 그때 언어로. 저물어 가는 저와 새 시대를 살아가는 자식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한때는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 그후



ㅡ고교 때 낚시 겸 처음 치마바위를 딱 한 번 찾아 가본다. 공군부대 뒤. 횡성강인가에 제법 너른 바위. 버스 탔고 치마바위서 세워 달라 했다. 걸어서 20여 키로.


공군부대까지 간 듯. 부대 끼고 큰 고개 넘으면 횡성이다. 그 서쪽에 횡성강과 출렁다리. 여기서도 도로에선 여전히 강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부대를 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막바지엔 아카시나무 새순만 찾았지 주변을 둘러볼 여유라곤 없었다.


ㅡ개구리 소년


1991년. 5명. 국민학교 3,4,5,6학년. 도롱뇽 알 잡는다며 갔다고. 그건 깊은 산. 사람 손 탄 곳은 못 산다. 초행이었을 거. 산속에서 길 잃지 않았을까. 굶은데다 물 한 모금 못 마시면 탈진. 산중 밤이면 저체온. 그런 거 아닐까. 준비 않은 성인도 산에 갇히면 까딱하면 죽는다 . 산은 시대가 없다.  없는 산은 언제고 원시다. 우리 넷도 산이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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