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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Jul 06. 2020

작은 기적

친구 속성


-- 공감하니 친구가 하나 둘 늘고, 즐기면서 배우고 깨우치기까지 하니 더욱 공감하려 노력할 일이다. -- 




겪고 보니 이러하네.
나 같은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더 즐겁고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려면.
너른 마음으로 품어 주시게.


2017년 5월 14일. 친절하고 사려 깊은 친구 초대로 밴드에 가입한 지 석 달 남짓.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많은 걸 배우고 깨우치고 있다. 것도 즐겁게 아주 즐겁게. 친구 아무도 내게 이래라 가르치지도 저래라 훈계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존경스럽게까지 되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째 이런 일이?

6월 28일. 난생처음 인생 보고서라는 선 이름의 반성문으로 세월의 공백을 고백하고, 우정의 단절을 꿰매서라도 잇고 싶은 열망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 후 거의 매일 매시간 손에 스맛폰을 달고 살았다. 옛 추억이든 지금 일이든, 아는 것이든 모르든, 누구든 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E.T.처럼 손가락 끝으로 실시간으로 교감했다.

틈틈이 폰을 뛰쳐나와 산을 타며, 주점에서, 친구 집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얼굴로 몸으로 마주했다.

부족한 것은 글로 끄적였다. 창피를 무릅쓰고 웃자를 시작으로 시 같잖은 시를  처음 써보고, 동심원으로 인생을 돌아보기도, 주검으로 입관 체험도 친구와 함께 해보았다. 나이 들어 느끼는 이런 감정 저런 소회를 글을 빌어 공유했다.

그래서인가 보다.

고교 시절 하나도 안 친했던 친구 아닌 친구들, 그 후 한때 친했지만 단절됐던 친구들이 어떤 녀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어떤 녀석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다가왔다. 재미있는 것은 나와 달리 단절 없이 알고 지냈던 친구들끼리도 친구의 변신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살을 맞대고 사는 아내의 단점은 귀신 같이 잡아내고 장점은 정작 남편 본인만 무시하고 지내는 것처럼. 마치 잘 알던 사람이 변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래도 공통점은 있어서 다들 무언가 배울 점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인생 반성문을 쓰기 전에는 배우기는커녕 비교했다. 비교하니 은연중 시기하게 되고, 시기하니 그나마 알고 지내던 친구는 소원해졌다. 꼭 시기한 것만은 아니어서 어쩌다 좋은 소식 전한다는 것이 친구에게는 상처가 된 것 같다. 내 깐에는 좋은 소식이라지만 어쩌다 만나 시간이 짧다는 핑계로 듣지는 않고 떠들어 대니 자랑질이 되었던 게다. 그러다가 큰 빚에 세월을 쫓기는 처지가 되고 보니 몇 안 되는 친구마저 일부는 끊기고, 끝내는 스스로 거리를 두어 잠깐인 세상에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버려지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친구들 앞에서 발가벗고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교우 관계가 최악이었고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서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손가락 터치로, 술로, 글로 어떻게든 공감하려고 노력했고, 공감하려 하니 친구들 마다 배울 점이 뚜렷이 보이게 되고 시나브로 존경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이제야 친구들과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얽히고설키다 보면 속 좁은 게 인간이라 마음 한 켠에서 비교의 악령이 언제든 되살아 날 수 있다.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고 친구가 말했듯이 비교의 유혹도 그리 다스릴 일이다.

공감하니 친구가 하나 둘 늘고, 즐기면서 배우고 깨우치기까지 하니 더욱 공감하려 노력할 일이다. 하지만 주기보다 받고픈 게 사람 욕심이라 먼저 공감받기를 바라는 간사한 이기심이 언제든 다시 고개를 쳐들 수 있다. 먼저 주고 나중 받아 보니 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이미 체험해 익히 알았으니 평생 장사꾼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당연히 그리 계속할 일이다.





후기



나이 들어서

공감은 친구를 진정한 친구로 만드는 묘약이다. 친구 사이에 젊어서 공감은 장식에 불과하지만, 나이 들어서 그것은 천군만마의 힘이다. 젊어서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늙어서는 없으면 더욱 외롭기 때문이다.
공감은 내성이 없어서 잦을수록 이롭다.

비교는 친구의 발길을 돌리는 긴 목록의 처방전이다. 친구 사이에 젊어서 비교는 자극이지만, 나이 들어서 그것은 좌절을 선물한다. 젊어서는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만, 늙어서는 이룰 수 없다는 박탈감 때문이다.

비교는 약효가 강해서 한 번만 복용해도 지독하게 오래간다.
 
이러하니 만일 친구를 둘로 구분한다면 공감하는 친구와 비교하는 친구라 할 것이다.


나이 들어서

친구 사이에 충고는 상처만 골라서 콕콕 찌르는 자랑질이다. 그러니 삼가는 게 상책이다. 진심 어린 조언은 충고와 달라서 필요할 때 쓰면 약이 된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충고는 절교 선언과 다름없다. 단 한마디에도 칼을 갈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터이니 절대 삼가야 한다.


나이 들어서

친구 사이에 외톨이가 되는 건 쉽다.
비교하라. 그러면 시기하게 되고, 시기하면 단점만 찾게 되고 결국 소원해진다.
자랑하라. 그것이 친구의 아픈 부분이라면 두 번 다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충고하라. 친구의 상처만 골라서 콕콕 찌르는 자랑질이어서 현인이라도 견디기 어렵다.
내 말만 하라. 듣기를 거부하면 결국 누구도 듣지 않는다.
부르지 마라. 슬픈 일 조차 부르지 않으면 결국 이름 조차 부르지 않게 된다.
돈을 빌려라. 먼저 신용을 잃고 결국 친구를 잃는다.
큰 빚을 져라. 영혼까지 메말라 결국 친구가 보이지 않게 된다.
다 할 필요는 없다. 이 중 한둘이면 충분하다.


나이 들어서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은 나다. 나를 제일 잘 아니까.
나를 가장 속 썩이는 제자도 나다. 알면서 행하지도 고치지도 않으니까.
나이 들어서 내게 편한 사람은 친구다. 서로 잘 아니까.
내게 고마운 사람도 친구다. 아니까 보고 따라 하기도 고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나이 들어서 나의 진정한 스승은 친구다. 가르치지 않아도, 혼내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고 행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나이 들어서 친구와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커녕 시기하게 되니까.


나이 들어서

친구라고 존경할 만한 이가 없는 것 아니다. 겉으로 친구의 성공이나 실패를 보지 말고, 내면에서 풍기는 성취의 향을 느껴보라.
친구여서 존경한다고 부끄러운 일 아니다. 남이라고 존경하고 친구라서 그리하지 않는다면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존경할 만한 친구가 있다면 존경한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하면 우정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나이 들어서

존경할 사람이 없어졌다. 많지만 익히 들어서 뻔하기도 하고 이젠 따라 하기가 늦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존경도 젊어서다. 그러니 존경도 나이에 맞게 신상이 필요하다.  

가만히 따져 보자.

존경할 만한 이가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웅 이순신, 세종대왕... 그들도 당대에는 질시, 견제, 비판이 괴롭혔다.

존경할 만한 이가 멀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그들도 얼마 전까지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우리처럼 육신을 버거워했다.

존경할 만한 이가 모든 걸 바친 것도 아니다. 굶어 죽도록 아니고, 최저 시급도 아니어서 그들도 세끼 밥에 고액 연봉까지 꼬박 챙겼다. 간혹 단식이야 했다손 치더라도 간헐적 단식이 건강에 이로우니 새롭다 할 것 아니다. 금혼도 교리일 뿐 일부러 미혼과 영원한 돌싱도 흔한 시대이니 이 또한 이채롭다 할 만하지 않다. 별난 사람도 아니어서 그들도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예쁜 여자 보면 곱다고 느끼고.

존경할 만한 이가 모든 사람을 일일이 힘들게 찾아다닌 것도 아니다. 그리 할 수도 없거니와 전파되거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갔다.

이처럼 그들은 우리처럼 살면서 우리처럼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만 그렇게 칭송받는 것일까?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중생을 위해서, 신자를 위해서, 즉 남을 위해서 했기 때문이다. 조목조목 따져 보았듯이 남을 위해서가 희생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배려다. 그냥 배려가 아닌 큰 배려다. 여기서 크다함은 나라, 백성, 중생, 신자와 같이 대상의 수가 많다는 것이지 찬찬히 살펴보았듯이 위함의 정도가 큰 것은 아니다.

좌우지간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거나 책을 통해 그들의 그러한 큰 배려에 감동하고 존경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일까? 어쩌다 글로 접하고 감탄하고는 돌아서면 도루묵 되느니 자주 접하며 볼 때마다 배우고 자극받아서 따라 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이나 종교 지도자처럼 대상의 수가 큰 배려는 아니지만, 그들처럼 널리 퍼지지 않고 사람들이 찾지는 않지만 그들처럼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서 주변 사람에게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배려는 그들 만큼 대상의 수가 많지 않기에 당연한 것일까? 존경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만일 그런 사람이 친구 중에 있다면 그 친구의 배려는 친구라는 이유로 당연한 것일까? 존경받으면 안 되는 것일까?

다행히 내 친구들은 다들 자신의 업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어 누구라 할 것 없이 배울 점을 지녔다. 게다가 존경할 만한 친구까지 하나 둘 생기고 있다. 더 많아지면 참 좋겠다. 


나이 들어서

나는 내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겪고 보니 이러하네.
나 같은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더 즐겁고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려면.
너른 마음으로 품어 주시게.




2017.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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