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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Aug 05. 2020

이래서는 안 되는 시범

청춘 비망록 - 대학편

대학 1학년 축제 때

태권도부 격파 시범 공연.


축제를 위해 처음 만난 녀 초대.

문과대학 아래 대강당이 축제를 즐기러 온 청춘남녀 수백 명으로 좌석은 물론 통로까지 꽉 찼다.

정면에 높은 무대로 흰 도복에 검은띠를 허리에 멘 신입생 넷이 일렬로 입장.

객석을 보고 도열. 난 세번 째.

각기 기왓장 10장씩 쌓아 앞에 대령.


1번  정권 격파

2번  수도 격파

3번  팔꿈치 격파 나

4번  이마 격파


정중히 관객에게 인사.

의례적인 박수.


격파!

사회자의 구령과 함께 넷이


야압! 


기합과 동시 격파.

셋은 10장이 무너져내리며 박살나 가루가 된다.


허나 난 석 장만 깨지고 일곱 장 멀쩡.

수백 명이 시선 집중. 조용히 나 하나만 빤히 쳐다본다.

나 혼자서 다시 자세 잡고 기를 끌어 모아서


야아압!  


두 장 더 깨지고 다섯 장은 또 멀쩡.

아, 쓰벌. 딴 녀석들은 사실 흰띠 초짜인데 가라로 검은띠 맨 거구

난 짜루 검은띠인데 왜 안 깨지지?

어제 기왓장을 미리 가져다 놓고 물을 계속 뿌려서 푸석한 건데.

심지어 이마빡 격파는 갓 찍어낸 거라  깨지기는커녕 슬쩍 대기만 해도 원래 모래 상태흩어진 건데.

그걸 미리 다 알고 무대에 오른 건데.


쓰벌. 내 꺼만 돌처럼 단단히 굳은 걸 갖다 놓은 거. 햇볕에 제대로 말린 건 한 장도 단단하지만 10장을 쌓으면 더하기 열 아니라 수십 배 강도라 태권도 9단에 격파의 달인도 어려운데.

아침에 관리를 못해 10장 통째로 부서진 거 대신 긴급히 최강의 강도로 대체하고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던 거.

검은띠니까 믿은 건지, 신입생이라 우습게 본 건지 이유를 따질 계제는 못 되고.


바짝 긴장.


짜고 치는 고스톱에 독박임을 알 길 없는 관중은 시선 집중해 나만 빤히 쳐다 보며 덩달아 긴장 반 애처로움 반.

사회자는 그만하고 내려가라 손짓하고.

가짜 검은띠 셋도 나때문에 무대에서 못 내려가고.


위기다.


허나, 나가 누구인가.

유일한 검은띠인데 이대로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부랄 찬 싸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하는 거.

촌놈이라 무식하지만 맡긴 일은 끝까지 책임진다.


세번 째 폼 다시 잡고,

이번에는 허공에 붕 떴다가 아래로 내려 오면서 팔꿈치에 힘을 실어서


야아아압! 


그래도 세 장 또 남은 거.

이미 깨진 다섯 장이 쌓여 충격 전달이 안 된다.


관중들은 참다못해 낄낄 웃고,

파트너 내려다 보니까 얼굴이 사색.


아우웃, 열받어.

폼이고 머고 생략하고는 오른 발 높이 들어서 


쿵쿵! 


당황해서 그런가 자세가 어정쩡해 그런가 발바닥에 힘이 안 실려 그런가 남은 두 장이 그래도 버틴다.

에라이, 관중이고 머고 파트너고 머고 최후의 결단.


발로 기왓장 더미 위를 딛고 오른다.

그리고 몸 솟구쳐 잔뜩 체중을 실어서 양발로,


쾅쾅쾅! 우지끈 쿵쾅!


완전 개박살. 위에서부터 아래 마지막 기왓장까지 산산조각.


순간, 


강당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초조와 연민과 불안의 삼중 피아노선이 일거에 뚝 끊기면서 관중석에서 천장을 날릴 듯한 환호와 박수 갈채가 터져 나온.


사회자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다 함께 차렷, 인사!


넷이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하니

다시 나를 향해 우뢰 같은 박수에다 엄지 척에 바람 센 휘파람까지 난리다.


속으로,

그래, 바로 이런 맛이지. 격파란.


무대에서 내려와 파트너 녀를 만나니 만면에 웃음이 가득 방글방글.


그리하여,

녀와 우히히히


그날 온몸으로 격파 시범은 대학 태권도부의 신화가 되었다.


81년 일이다.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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