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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Nov 04. 2021

절정의 아메리카노

환갑 예찬 - 8화

아주머님! 쌀쌀해지니 커피가 확 당기네요. 이게 커피 맛이로군요.이래서 맛 보고 커피집 찾아가는 거군요. 이런 맛 처음입니다. 커피를 습관으로 마셨지 맛을 따진 건 아닙니다. 이제는 이거 마시러 일부러 산책 코스 이쪽으로 잡네요. 하하하.


산책로 봉산이 품은 봉산동. 거기 경성꽈배기. 노부부가 내린 커피는 달랐다. 정 담뿍 담아 뜨겁게 찰랑찰랑. 블랙 브라운. 색 즉 맛. 브라운이 확연치 않고 컵 안쪽 테에서 비추지만 블랙은 또 아니다. 옅은 듯 색처럼 깊은 맛. 쓴 듯 쓰지 않고 신 듯 시지 않으며 살짝 짠 듯 짜지 않다. 한 잔 아메리카노가 맛의 오케스트라. 여러 경계선에 올라 동시에 줄타기 곡예. 절묘하다. 대개 남자 사장님이, 바쁜 때는 아주머니가 커다란 기계를  손처럼 능숙하게 다루어 커피를 잔에 가득 담아 낸다.


블랙 브라운. 색 곧 향. 향 또한 색과 맛처럼 옅은 듯 을 터. 터라 함은 냄새를 맡지 못 하니까. 비후성비염, 축농증으로 수술 세 번. 두번 째가 25년 전쯤. 전신마취 두 시간 대수술. 그때 후각을 고스란히 잃었다. 그렇다고 냄새를 모른다면 오산. 시각 장애는 손으로 보고 청각 장애는 눈으로 듣지 않는가. 후각 장애는 보고 듣고 느낀 걸 논리적 사고로 조합해 향을 맡는다.


온도는 맛을 따따블 혁신한다. 늦가을 갑자기 기온 뚝 떨어진 아침. 열기 하나가 오감을 싸잡아 능멸한다. 시청후촉 심지어 미각까지도. 잔을 채운 열은 혀 데지 않되 입술이 감내할 정도. 조바심으로 후후 불지 않되 조심은 해야 할 정도. 종이컵은 감싸안기 부담되어 첫 반 모금 얼른 하고 내려놓을 정도. 몇 번 그러고 나면 한 모금씩 넘기는 정도. 커다란 컵을 그득 채우는 건 인심도 있지만 열을 넉넉하게 보존한다. 여름 한철 아이스 아메리카노 특수를 기대하면서도 가을에 이처럼 핫 아닌 온커피만 고집한다면 진정한 커피 바리스타라 할 수 없다. 편의점 커피가 이렇다.




ㅡㅡㅡ




이 나이 되도록 40여 년간 커피 맛을 몰랐다. 첫 만남 기억은 없다. 70년대 고교는 아니었으니 대학 때였으리. DJ 음악 신청한다고, 미팅한다고 다방 들락거렸으니 틀림없이 주문은 했을 거. 맛을 모르니 군 최전방 철책에서 힘들여 찾을 일도 없었다.


80년대 말 회사서 봉지 커피 단맛에 꽉찬 머리 쉬일 겸 간간이. 신입 때 커피 준비하는 탕비실에서 우당탕 쿵탕! 여직원이 울며 뛰쳐 나온다. 평소 커피 타오는 태도 고깝다고 선배 사원이 작정하고 문 걸어 잠근 후 흠씬 두들겨 팬 거. 아무리 폭력 시대라 해도 이건 아닌 거. 징계하기 전 자진 퇴사.


커피 먹는 빈도가 급증한다. 십 몇 년전 매장할 때 매일 믹스 커피 열댓 잔. 11시간 영업이니 시간당 한 잔 이상. 회사와 달리 자영업은 일대일 고객 상대라 상품 팔려면 말이 많아진다. 회의, 전화 외엔 말 할 일 드문 회사보다 커피가 훨씬 더 당긴다. 바빠서 끼니 놓치면 칼로리 보충으로 한 잔. 결혼 세트나 단체 주문으로 매상 팍 오르면 기분으로 한 잔. 손님 뜸하면 시간 때우려 한 잔. 어쩌다지만 거래선, 직원 서서 상담하면서 한 잔....50개 종이컵 한 줄이 며칠 못 버틴다. 시키기도 사러가기도 귀찮으니 석 줄, 다섯 줄로 구매 단위가 커진다.  


일 년쯤 후 건강검진. 공복 혈당 150. 당뇨병 판정. 뭐, 당뇨병? 이전 검진서 늘 정상이었는데? 체중 관리 늘 BMI 23 잘하고 있는데? 병원 바꿔 다시 해봐도 역시 수치가 엇비슷. 병인은 대개 지난 날에 있는 거. 가만히 일과 되짚어보니 아하, 커피 믹스. 믹스란 게 알고 보니 설탕이 거반이었던 거. 건강해서 의식 안 했는데 따져보니 하루 열 다섯잔이면 흰설탕 그대로 일곱 봉지 가량. 매시간 꼬박 설탕을 반 봉지 이상 입에 털어넣은 거.


아차차, 아부지! 당뇨, 고혈압으로 풍이 와 쓰러지신 기억이 퍼뜩 떠오른다. 그때 아부지 50세. 그 병으로 57세에 돌아가셨다. 나도 50 다 돼 가네. 젊어서부터 꿀을 몇 숟가락씩 퍼드셨다고. 설탕이나 꿀이나. 아이고, 큰일났다. 당장 그날부터 누런 비닐 포장 봉지 믹스 뚝 끊었다. 대신 반만하고 까만색 봉지에 든 블랙 커피.


씁쓸한 게 나름 괜찮다. 카페인 인이 핏속과 뇌에 깊이 박힌 거. 쓰면 한약이니 몸에 좋겠다 생각도 들고. 그렇게 블랙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커피숍 가면 아메리카노 시키고. 그리고 편의점 아메리카노. 우유든 건 50세인가부터 소화 못 시켜 먹어본 적 없다. 봉지 커피 맛 잊지 못 해 아주 가끔 먹는다. 설탕이 당뇨에는 독이니 미리 반 따라 버리고 나서 홀짝홀짝 아껴서. 프랑스 커피 대가가 봉지 믹스 커피 마셔 보고 그랬다지 않나. 이렇게 훌륭한 커피 처음 맛본다고. 그리고 귀국길에 믹스 커피를 박스로 바리바리 챙겨갔다는.


아메리카노 음력 10여 년. 인이 박혀서, 보약이거니, 입 심심 달래려, 습관적으로 마신 거. 커피 맛 찬양하는 이들이 유별나다 여겼다. 그랬던 내가 커피력 40여 년만에 단맛, 쓴맛 말고 커피 맛을 알게 되었다.




ㅡㅡㅡ




경성찹쌀꽈배기. 찹쌀 꽈배기 전문. 찹쌀 꽈배기나 찹쌀 팥도너츠에 설탕 듬뿍 묻혀달라 해 커피랑 곁들인다. 단맛, 찹쌀 씹는 맛이라 커피와 말 그대로 찰떡궁합. 보통 하나고 식사 대신이면 세 개 시킨다. 주문 받으면 바로 튀기기 시작. 아이들 간식으로 단체 주문도 많다. 가성비 갑에 배달도 된다고. 돈 받은 거 없지만 광고다. 자발적 홍보. 병처럼 알리면 좋은 게 맛집이니까.


아메리카노 한 잔은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 매일 단 한 잔이라 그렇다. 대개 아침밥 먹지 않고 봉산 두어 시간 산보 후라 더욱 그렇다. 봉산 산책 후 커피 몇 달 되었다. 처음엔 무인 커피숍. 그다음 편의점을 이용했다. 가나초코렛 보이길래 조합이 맞을 거 같아서 곁들인다. 그러다 꽈배기집 발견. 봉산 일대가 밀림과 같아서 코스를 제멋에 겨워 매일 갈아탄다. 덩달아 커피점도 여럿. 요즘은 편의점, 꽈배기집을 하루 걸러 번갈아 들르는 편. 무인 커피숍은 기계 고장이 잦아 뜸하다. 펀의점 커피는 쓰다. 핫하지도 않아 차순위.


일 년전 공복 혈당 145. 당뇨 판정 이후 늘 이 정도. 걷기 생활화. 한약 삼아 아메리카노 외에 약을 따로 먹은 적 없다. 수치 다시 재봐야겠다.


년중 아메리카노 맛의 절정은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날 아침이다.


가을은 아메리카노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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