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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규을 May 21. 2024

9일동안 두 번의
장례식을 겪으며-[2]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호국원.

9일간의 두 번의 장례식을 겪으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약 8일후에, 다시 아버지한테 나는 전화를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엄마와 외삼촌을 태우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가셨다. 큰 누나에게 바로 전화를 했고, 큰 누나는 헉 소리와 함께 알겠다고 했다. 나는 다음 날 오전에 바로 오라고 해서 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급하게 아울렛을 들려서 검은 색 셔츠를 샀다. 물론 완전 검은색 셔츠는 없어서, 굉장한 짙은 남색 셔츠를 샀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나는 이렇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부부가 사이가 좋으면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봐온 대로 외할머니,할아버지는 사이가 굉장히 좋으셨다.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서 절을 하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절을 하면서 보니, 대한민국이라고 되어있는 깃발이 영정근처에 놓여있었다. 아마도 외할아버지께서 6 25전쟁 참전용사셔서 그런 것 같다. 나도 조문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조문객분들께 인사를 드리면서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드렸다. 저번보단 조문객들이 더 적었다. 아무래도 외할머니 장례식때 오신분들이 얼마 안 돼서 또 오시기 힘들테고, 주말이라서 기존에 있던 약속들로 오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누나들과 매형들이 내려왔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진 않았다가, 저녁때가 되니까 사람들이 조금 붐볐다. 오랜만에 뵙는 어머니 친구분들께 인사드렸다. 그리고 저녁이 돼고, 어머니께서는 저번에 운구할때 사람이 별로 없어서, 특히 남자가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고, 이번에는 나한테 남으라고 했다. 누나들과 매형은 아쉽지만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아버지와 나는 친가로 가서 하룻밤 잤다. 어머니는 빈소를 지키셨다. 


3일장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할아버지를 입관하고, 장례지도사의 지도를 따라서 운구를 하러 갔다. 할아버지는 6 25전쟁 참전용사셔서 할아버지의 관은 태극기로 덮여있었다. 관을 다 같이 드는데, 너무나도 슬픈 울음소리가 뒤에서 들려와서, 나도 슬펐다. 외할아버지의 여동생이신 고모할머니들과 엄마와 이모가 굉장히 슬퍼하셨다. 나중에 듣고 보니, 이번에도 엄마는 편지를 써서 외할아버지 관에 같이 넣어드렸다고 한다. 


일단 화장터로 갔다. 유리벽을 하나 두고, 유족들이 있는 곳과 화장하는 공간이 분리됐다. 화장하는 공간에는 유족들은 출입이 불가능했고, 오직 직원들이 정성스럽고 조심스럽게 화장하는 공간에 외할아버지를 넣어드렸다. 외할아버지가 들어가실때 어머니는 아빠라고 하면서 슬프게 우시고, 아빠도 그동안 감사했다면서 슬퍼하셨다. 


화장을 하고 유골함에 외할아버지를 모신 후에 유족들은 버스를 타고 외할아버지,외할머니 댁에 갔다. 버스에서는 기도문을 계속 암송하는 방송이 나왔다. 2,30분을 가니 나도 익숙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집이 텅 비어보였다. 엄마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셨고, 아빠가 엄마를 부축했다. 나도 눈물을 흘렸다. 고모할머니는 오빠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우셨고, 동네분들도 많이 우셨다. 사촌형이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댁을 한바퀴 돌고, 안 쓰는 그릇을 발로 밟아서 깨트리면서 절차가 끝났다. 엄마는 이제 여기 다시 올 일이 없겠네하면서 엉엉 우셨다. 

이젠 다시 갈 수 없는 외할아버지, 할머니댁

이제 장지로 출발했다. 장지로 가기 전에 버섯 전골을 먹었는데, 나는 굉장히 먹을 게 없어서, 조금만 먹었다. 밥을 먹고 엄마와 산책을 하는데 노란색 개나리가 정말 많았다. 엄마는 '이렇게 좋은 계절에 가셔서 다행이다.'라고 하셨다. 나중에 아버지도 식사를 마치고 따라나왔다. 다 같이 손을 잡으면서 걸어가니까, 이모부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누가 상복을 입고 사진을 찍냐면서 말했지만, 나랑 아빠가 외할아버지가 엄마가 마냥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라면서 다 같이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후에 바로 장지로 다시 출발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장지는 바로 "호국원"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훈장을 받거나, 다쳐서 장애인이 되신 분들은 "현충원"으로 간다. 그 외의 참전용사분들은 "호국원"으로 가는데, 외할아버지는 전쟁 후기인 52년부터 종전까지 육군 포병으로 계셨다. 놀랍게도 내가 있었던 육군 훈련소 1기라고 들었다. 


호국원에 4,50분을 걸려서 도착했다. 내가 풍수지리는 몰라도, 호국원은 딱 봐도 양지바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빛도 따뜻하게 있고, 산세가 좋았다. 산이 언덕을 휘감았다. 규모도 크고 관리도 잘된게 느껴졌다. 

호국원 전경.

호국원의 추모의 계단에서 나는 어떤 구절을 봤고, 그 구절이 아직도 마음에 맴돈다. 

추모의 계단. 이 계단을 통해서 올라간다. 그리고 호국원에 있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호국원에 가서 "안장식"이라는 것을 했다. 안장식을 하면서 안장식을 진행하는 한 분이 오셔서 정말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셨다. 안장식 중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끼리 웃으면서 떠드니까,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분들한테 다가가면서 "안장식"중이라고 말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이런 모습에서 굉장한 감사와 신뢰를 느꼈다. 


안장식 중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끝까지 관리하겠다고 했다. 국가에 이바지했으니, 이젠 국가가 책임진다는 말인데, 외할아버지 삶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교사도 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고, 고모할머니들이랑 친했던 거 보면, 그리고 그간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할아버지는 참 멋진 삶을 사셨던 것 같다.


안장식이 끝나고 나서 유골함이 안장된 철문이 닫히기 전에 어른들께서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너무 감사했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할아버지한테 다음 생에는 꼭 부자로 태어나서 고생하지 말라고했다. 그 말이 정말 슬펐다. 예전에 어머니가 교사 은퇴하실 때 쓴 글을 보면, 자기가 어렸을 때는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집에 돈이 없어서 그걸 못한게 슬펐는데, 교사를 하면서 의외로 그 재능을 살려서 많은 일들을 했다 라고 적었었다. 어머니도 어렸을 땐 외할아버지의 딸로서 집에 돈이 없어서 슬프고 서러웠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에서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집에서 풍족하게 뭔가를 받아본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부자로 태어나서 고생하지 말라는게 외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묻어나와서 나도 슬펐다. 


막내 외삼촌 차례가 됐고, 외삼촌은 외할아버지한테 '아버지, 천국 가세요.'라고 했다. 막내 외삼촌은 아까 화장하고 그럴때, 전혀 울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가 화장이 끝나고 나서 삼촌은 괜찮아?라고 하니까, 삼촌은 원래 슬픈 사람 따로, 이런 절차 챙기는 사람 따로 라고 하셨다. 그런 삼촌이 모든 절차가 끝나고 슬픔을 정면으로 보면서 천국 가라고 한 말이 너무 슬펐다. 

내 할머니, 내 할아버지

호국원에서 안장식까지 하고 나서, 장례식장으로 가서 다 같이 인사 및 이야기들을 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간다고 했고, 고모 할머니들이 꼭 안아주시면서 용돈을 쥐어주면서 미국가서 밥 잘 먹으라고 하셨다. 외가쪽 어른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엄마아빠랑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운전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사람들 많은 연구실로 한번 들리고, 다시 집으로 갔다.


이렇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잘 성장한 제가 이제 미국에 가서 꿈을 펼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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