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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이 May 06. 2021

큰딸은 나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친절함에 ~ 외로워서 시작한 동거



 혼자 있는 것은 불안하고 싫다.

오늘도 아이들이 할머니 생신이라서 할머니 댁에 간다고 아침부터 준비하고 나선다. 

애들 아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주말 아침 월명산 운동을 하면서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들어서 같이 가는 동생에게 나의 증상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내 눈앞에 있으면 폭풍 잔소리로 아이들의 귀를 틀어막지만, 막상 아이들이 할머니 댁에 간다거나 아빠하고 가서 자고 온다고 하면 허한 가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학원 때문에 안 자고 다들 집에 일찍 온다고 하니 덜할 것도 같은데 이상 야릿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없으면 난 늘 청소를 시작한다. 

주말이면 직장 맘은 바쁘게 집안일을 한다. 아무리 바빠도 산에 산책 가는 일을 포기할 순 없다. 나의 일주일 피로를 풀어주는 방법이다.    



늘 해도 해도 표 나지 않는 것이 집안일 같다.

오늘 청소는 다른 날과 다르게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전투이다. 늦은 청소. 청소하는 도중에 아이들이 도착했다. 기쁜 마음을 표현해 줘야 하는데, 퉁퉁거리고 들어오는 막둥이 때문에 또 아이들에게 묻다가 다그치게 되고 또 혼내게 된다. 왜 내 생각처럼 아이들에게 대하지 못할까? 

아이들은 왜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을 만들까?    



화를 내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큰딸은 늘 나의 결혼 생활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10년 전부터 부모교육 등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딸에게 문자를 보낸 일들이 있었다. 내가 교육을 들을 때마다 큰딸에게 너무도 큰 상처를 주고 살았던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어렸을 때 많이 혼내고 때려서 미안해”

“또 왜 그런데, 또 뭔 교육 듣는 거야? 괜찮아 나 생각 하나도 안나”    



답장을 이렇게 쿨하게 보내주었지만, 왜 기억이 안 나겠는가? 

지나가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게 상처라고 하는데, 큰딸의 가슴에는 상처로 진물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늘 그랬다. 남편이 나에게 잘못을 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어딘가에 풀었어야 했다. 그때 조금이라도 큰딸이 잘못도 아닌 잘못을 하면 분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밤늦게 하는 프로. 아동학대에 대해서 나오는 프로였다. 새엄마가 아이들을 학대하고 껌 하나 먹었다고 때려서 숨지게 하고 한 명은 땅에 묻어서 나중에 찾아냈던 사건 사고를 보면서 나의 폭력성을 뒤돌아보게 되었고, 나도 저런 학대하는 새엄마와 방관하는 아빠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슬프고 무서워서 그날 저녁 참 많이도 울고 반성하고 또 반성하였다.  


  

자는 아이들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나쁜 엄마에게서 그래도 속으로는 상처가 나도 겉은 밝아 보여서 잘 자라게 보이는 내 아이들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수투성이 엄마이다. 늘 부족한 엄마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엄친아 이야기를 많이 한다. 엄마 친구는 말이지 이러이러하대~ 이제는 아들이 “그게 누군데?” 하면서 말대꾸를 한다. 듣기 싫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알면서 자꾸 하게 된다. 착한 우리 애들은 듣다 듣다가 지겨우면 누구인지 캐묻는다.

“네가 말하면 알아”

“엄마도 모르는 사람 말하지 마세요”

머리가 띵~ 그래 안 해야지 하면서 답답하고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또다시 잔소리하는 엄마는 바보이다. 이야기하면 뭐 한다고 아이들이 바로 고쳐질 것도 아닌데 말이다.      



딸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고 알고 있으면서 기대를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인가 보다.

지금도 얼굴 안 볼 때는 잘해야지 그땐 못 했던 것 미안해서라도 잔소리 안 하고 잘해야지 하면서 나의 입은 딸을 보면 자동으로 리모컨이 켜지는 것 같다. 오늘부터 비밀번호를 채워놔야겠다.    



아이들 아빠와 나는 안 보고 산 지 6개월 정도 되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연락 오면 할머니 댁에 가서 자고 오고 한다.

서류 정리 한지는 3년 정도 되었지만, 2년 정도는 같이 각방을 쓰고 같이 살았지만, 지금은 이제 서로 얼굴도 잘 안 보고 산다.  한집에 있을 때는 작은 방에 있는데도 그 사람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오고 숨이 차는 것 같았다.


    

아이들 아빠를 달래서 아이들 교육비라도 혜택을 받으려면 호적을 정리해서 한 부모 가정으로 있어야 한다고 달래서 이혼을 했다.

아이들 아빠는 직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란 것을~ 외로워서 시작된 동거, 친절함에 이 사람이라면 나의 울타리를 잘 꾸릴 수 있겠구나 했던, 나의 결혼 생활은 25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는 2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는 잘못을 하면 처음에만 놀라는 척 미안한 척 한 번이 지나고 두 번째부터는 뻔뻔해진다. 난 그 당당하고 뻔뻔함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오죽하면 아이들까지 놓고 갈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참고 또 참게 된다. 그런데 그게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 있으면 어떤 모습으로든 표출되어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지금 이렇게 떨어져 있음으로써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차라리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남편의 그늘 속에서만 살다가 내 힘으로 아이들 셋을 키워내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큰 속 안 썩이고 비싼 것 사 달라고 조르는 법도 없고 아직 엄마에게 큰 반항 부리지 않고 잘 자라주고 있어서 고마움을 느낀다.    



글쎄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이들 아빠와 처음 만나서 시작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이들 아빠 잘못을 알고 처음에 참았던 것이 잘못일까?

또다시 시작된 잘못에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잘못일까?

그 후 회사 명퇴에 창업에 창업 실패에 집이 은행이자를 못 내서 경매로 날아가는 일을 우리 아이들과 난 함께 견디고 이겨내야 했다.

견디다 못해 폭발하는 나의 반응에 더 당당해지고 상처를 주는 말에 이건 아니다.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나의 실수는 여기까지다.

나의 삶은 내가 개척해 나갈 것이다.

지금은 작은 월급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화려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직장생활도 1년 6개월 웬만하게 적응 잘해 나가고 있다.    



국민연금은 9년을 더 넣어야 65세 되면 받을 수 있다. 늘 프리랜서만 하다가 사대보험이 나오는 직장을 이제 다니니 국민연금을 꼬박 10년을 더 넣어야 탈 수 있다. 남편의 국민연금으로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서로 명세서를 보면서 많이 나온다고 이 금액이면 우리 두 늙은이 쓸 수 있을 거라고 말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 홀로서기다. 난 오뚝이다. 절대 넘어지지 않고 다시 설 것이다.


   

난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금만 친절하면 마음이 간다. 문제다.    



이 글을 쓸 때 많이 망설였다. 날 아는 사람들이 아직 나의 이혼을 모른다.  밝은 성격 때문에 아니 나의 자존심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생활했기 때문에~ 이혼했다고 하면 선입견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이제 용기를 내어 본다.

난 세 아이의 엄마이다.

엄마는 강하다.       


                 

막내딸이 엄마의 주문에 맞춰 그려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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