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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이 Apr 22. 2022

영기~서영기

아빠 기억

  

 영기~굴뚝에 나는 연기가 아니라 영기 서영기~

아빠의 이름이다. 말이 없었던 아빠, 내 기억 속의 아빠는 술 안 드시면 말이 없었다. 술이나 한잔 드셔야 여러 이야기를 하셨다. 약주가 거하게 드셨을 때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할 때도 있었다.  

         

요즘 계속 아빠가 꿈에 나타난다. 나와도 별거 없다. 옛날 집에서 별일 없이 생활하는 꿈을 꾼다. 꿈에 잘 나타나지 않았는데, 왜 요즘 자꾸 꿈에 보일까? 예전에는 아빠가 꿈에 나타나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빠는 자식들이 너무 어려서 제삿날을 챙기다가도 잘 못 챙길 때가 있었는데, 막내 고모 꿈에 나타나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파서 한참 아빠 제사를 어린 내 손으로 잘 챙겨드렸다. 음식을 많이 하기보다 구색만 갖추어서 따뜻하게 정성 들여서 차려드렸다.     


요즘은 나도 나이도 먹고 기독교라서 제사상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기일을 기억하고 산속에 가서 인사드리고 오고 한다. 평일일 경우에는 그냥 지나가고 휴일에 맞춰 아이들과 산소에 인사드리고 온다. 산소에서 난 주저리주저리 아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오빠도 도와주고 우리 집도 도와주고 아이들도 잘 되게 해 주고 ” 이런저런 잘 되게 해 주라고 하면 옆에서 딸이 할아버지가 많이도 바란다고 하겠다고 하면서 함께 웃고 산을 내려오면서 자꾸 산소를 뒤돌아보며 돌아온다. 아빠가 계속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 돌아보는 것 같다.       


   

기억 1.   

  

 아빠와 나는 이부자리에서 엎드려서 아빠는 책을 읽고 일기를 쓰셨다.

난 그 옆에 딱 붙어 엎드려서 아빠가 만들어준 누런 종이로 만든 연습장에 공주 옷을 입은 공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서로 별말은 없다. 아빠는 아빠 일을 하고 난 내 일을 한다. 학교 다녀오면 숙제부터 끝내고 그림 그리고 놀았다. 그때 기억이 나는 것도 우리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이부자리에서 오래 누워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 계절은 겨울이다.

아빠는 노동을 하시는 분이라서 비가 오거나 겨울철에서 일거리가 없어서 집안에서 누워있는 날이 많았다. 내가 성장해서 생각해보면 아빠가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표현이 되어서 말하게 되었다. 무능한 아빠가 싫었던 것이다. 겨울철 일을 못 나가면 봄까지 미리 월동 준비해 놓은 김장김치와 쌀로 겨울을 보냈다.    

       

무능한 아빠가 싫었던 기억은 내가 (국민)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빠가 아침에 오신다고 했지만, 아빠는 딸 졸업식 날 변변히 짜장면 한 그릇 사줄 돈이 없어서 못 오신 것 같다. 친구의 엄마가 친구와 사진을 찍어주고 함께 축하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초라한 졸업식이 되었을 것이다. 졸업사진은 그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 사진 한 장 없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뚱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속상하고 슬펐다. 이제 일어나서 씻고 계시는 아빠가 미웁고 무능해 보였던 것이다.   

  

무능하고 불쌍한 아빠는 그렇게 병들어 가고 있었다.

졸업한 딸자식 중학교도 못 보내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마음에 병이 더 생겼을 것이다. 그 길로 딸은 외갓집으로 가버리고 한참을 오지 않고 엄마 없는 외할머니 댁에서 보냈다.     

 

한두 달 지났을 것이다. 막내 삼촌이 찾아왔다. 

아빠가 많이 아프시고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하셨다. 급하게 집에 돌아온 딸은 너무 놀랬다. 멍하니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두 달 사이에 이렇게 갑자기 병환이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날 밤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 사진 액자에 예쁘게 색종이로 꽃을 만들어서 붙여놓은 것을 떼라는 손짓을 한 그날 아빠는 가셨다. 저승사자가 온 것 같았다. 죽기 싫었던 것이다.     


술을 많이 드셔서 병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아빠는 마음에 병으로 돌아가신 것 같다. 병원을 안 가서 병명을 알 수 없었지만, 배에 복수가 올라왔다가 돌아가신 후 소변으로 쭉 빠진 것이 간 쪽에 병이 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불쌍한 우리 아빠 항상 꿈에서도 쪼그려 앉아서 좋아 보이지 않더니, 요즘은 그래도 말끔하게 나오신다. 다행이다. 좀 편안해 보여서~       


        

기억 2.     


 낡은 앨범 속에는 아빠의 헌병 옷을 입고 찍은 사진과 교통정리를 멋지게 하는 사진들이 있었다. 아빠는 월사금을 못 내어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국민(학교) 졸업도 못하고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고 군대에 가서 열심히 이불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 대야 국민학교에 가서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아빠에게 들었다. 헌병 생활을 하면서 취침 시간에 이불 뒤집어쓰고 공부하다가 걸려서 벌을 받고 어떤 날은 불 끄게 하고 단체로 얼차려를 받았다고 한다. 누구 때문에 벌을 받는지 알면 군인들한테 큰일 나니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단체 기합을 받았다고 아빠가 이야기해주었다. 아빠도 그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셨나 보다.      

그 덕분에 나도 책 보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우리 집에는 읽을 책이 없으니, 친구 집이나 동네 동생 집에 가면 전집이 많았다. 그 집에 놀러 가서 전집을 계속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기억 속의 위인전의 위인들은 그때 읽고 알았다.   

  

아까 중학교를 진학 못 했다고 했었던 이야기로 가서 그 후 다음 해에 중학교를 돈 벌면서 다니는 야간학교에 진학에서 잘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잘 나오고 일반대학은 못 다녔지만, 방송통신대학교도 늦게 졸업하고 배움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때 학교 못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게 우리 집이었다니까요. 그래도 지금  잘 살고 있어요.      


         

기억 3.     


 여름만 되면 시원한 콩국수를 사 먹는다.

내가 콩 삶아서 갈아서 할 수는 없고 콩물을 사 와서 집에서 국수 삶아서 콩국물을 붓고 오이 채 썰고 수박이 있으면 작은 삼각형으로 잘라서 모양을 내서 아이들에게 내주면 아이들은 시원하게 잘 먹는다. 우리 집 아이들은 먹성이 좋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잘 먹어준다.     


여름에 내가 콩국수를 먹는 이유,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가 여름에 대포 집 같은 곳으로 데려가서 사주었던 콩국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맛의 기억은 없다. 그저 아빠와 함께 가서 먹었던 콩국수가 기억에 남아서 별미로 먹는다.


아빠와 함께 했던 기억은 13년밖에 없다. 짧은 기억 속에 하나씩 생각나는 것은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 기억 속에도 나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었으면 한다.       


   

기억 4.      


 약주 한잔씩 마시고 오는 날에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서 나의 고사리 같은 손에 놓아준다. 술안주로 나왔던 땅콩과 콩 삶은 것들을 챙겨다 주셨다.


술집에 가서 기본 안주로 나오는 삶은 콩을 난 잘 까먹는다. 친구들이 날 콩순이라고 부를 정도로 혼자서 암말 안 하고 잘 까먹고 또 달라고 한다. 

가끔 까먹으면서 아빠 생각을 한다. 주머니 속에서 꺼내 주던 술안주~

어린 나는 아빠에게 “아빠 한 잔만 뭐(먹어)” 손가락 하나를 펴고 말했다고 한다.


아빠는 어린 딸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아빠의 기억은 계속될 것이다.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수많은 기억이 있지만, 가끔 생각 안 날 때가 있다. 난 망각의 동물이니까. 오늘은 어릴 때 친구들을 만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나누면서 부모도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었다. 나의 자식들에게 상처 주었던 것들을 반성하고 하지 말라는 서로에게 주언을 하였다. 난 진심을 담아서 생각나는 잘못들을 하나씩 아이들에게 보냈다. 그때 미안했다고 엄마 마음속에 화가 많았다고 사과를 하였다. 진심이었는데.     


“괜찮다 마!” “오늘 왜 그래? 크크”

“갑자기 왜 그래 크크크”

“갑자기??”     


아이들의 반응, 늘 마음에 있었다고 너희들도 마음속에 갖고 있지 말고 서운한 것 말해주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입을 다물던지 걸러서 해야 한다. 난 가끔 꼰대가 된다. 우리 아이들 기억 속에 엄마가 고집불퉁 꼰대가 아닌 그리운 엄마로 남으려면 나도 입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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