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본래 이렇게 차가운 쇠 냄새가 나는 곳이었을까. 곁에 있던 친구가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주사기 끝에서 번뜩인 차가운 빛이 그의 뒷다리 근육을 무력하게 녹여버렸다. 친구는 마지막 순간, 초점 없는 시선으로 벽면을 바라봤다. 의식이 흐려지며 그는 차가운 냉장고의 냉기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나는 봤다. 그것이 잠이 아니라 영원한 단절임을. 철장을 박차고 달렸다. 사람들의 발바닥 사이를 지나, 열린 틈을 타 필사적으로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발바닥 이 갈라지고 뜨거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거리에는 나를 부르는 다정한 말 대신 날카로운 경적 소리와 타인의 구두 굽 소리만 가득했다. 빗물에 젖은 털은 이제 나의 무게가 아니라 내가 짊어진 슬픔의 무게가 되어 나를 끌어내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나는 버려진 것인가. 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묻는다. 나를 지운 당신의 세상은 여전히 평온한가.
흰 솜뭉치와 보낸 16년의 시간, 그 녀석의 그의 이름은 ‘깜지’였다. 몰티즈 특유의 고운 흰 털을 지닌 녀석은 이름과는 다른 색을 지니고 있었다. 깜지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제 어미와 떨어진 지 두 달여,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 작은 생명체는 내 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치 오래전부터 내 자리였다는 듯 쏙 안겼다.
깜지를 만난 그해, 큰딸 선영이가 태어났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왔을 때, 깜지는 짖는 대신 다가와 아이의 발끝을 조심스레 핥았다. 그것은 종(種)이 다른 두 생명이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는 고요한 만남이었다. 그때부터 깜지의 시간과 선영이의 시간은 나란히, 그러나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선영이가 옹알이를 뗄 때 깜지는 현관 밖 발소리의 미세한 차이로 나를 구별해 냈고, 선영이가 초등학교 가방을 멜 때 깜지는 이미 중년의 고독을 아는 듯한 깊은 눈빛을 갖게 되었다. 깜지의 16년은 인간의 80 년에 가깝다. 녀석은 선영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제 생의 전부를 반가움과 기다림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내주었다.
일요일 오전, 청소를 하느라 잠시 열어둔 현관문 틈으로 깜지가 사라졌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선영이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막뿐이었다. 집 안 곳곳에 흩어진 흰 털 뭉치와 온기는 그대로인데, 정작 그것을 발산하던 생명이 사라져버린 거실은 낯설었다.
“아빠, 우리 깜지 못 찾으면 어떡해?”
선영이의 젖은 눈동자는 곧 나의 무능함에 대한 소리 없는 질책이었다. 반나절 뒤, 경비 아저씨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화단 구석에서 깜지를 발견했다. 녀석은 제 몸보다 큰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작은 심장의 박동은 손바닥을 타고 내게 묻고 있었다. 나를 잊은 것은 아니냐고. 그날 밤, 깜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배를 드러내고 코까지 골며 자는 모습에 우리 식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존재는 부재를 통해서만 그 무게를 증명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깜지의 평화로운 잠이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이 될 것임을 예감하며, 나는 녀석의 따뜻한 배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깜지에게도 시간의 파도는 예외 없이 들이닥쳤다. 까맣던 코는 빛바랜 회색으로 변했고, 맑던 눈동자에는 노안의 뿌연 안개가 끼었다. 그래도 녀석은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나면 비틀거리는 다리로 마중을 나왔다. 발바닥이 딱딱하게 굳어 거실 바닥을 딛는 소리가 ‘탁, 탁’ 하며 메마르게 울릴 때마다 내 가슴 한구석에 금이 갔다.
“깜지야, 나 왔어.”
선영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깜지를 안아주면 녀석은 힘겹게 꼬리를 흔들었다. 깜지는 며칠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 앞에서도 의연해 보였다. 어쩌면 녀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명이 다했음을. 선영이가 성인이 되고 우리가 삶의 한 단계를 무사히 마칠 때까지, 녀석은 온 힘을 다해 우리 곁을 지켜주었다. 깜지는 지난밤 조용히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나는 이제 대답할 수 없는 녀석의 안부를 저세상 입구로 띄워 보낸다. 반려견의 죽음을 이르는 그 표현은, 언젠가 다시 만날 때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는 눈물겨운 배려다.
깜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 나는 공원을 산책했다. 녀석과 함께 걷던 길 위에서 나는 종종 낯선 시선들과 마주쳤다. 주인의 손을 잡고 위풍당당하게 걷는 반려견들이 있는가 하면, 어딘가 그늘진 곳에서 사람의 동태를 살피며 쓰레기봉투 주위를 서성이는 유기견들도 있다. 어느 비 내리는 저녁, 공원 벤치 밑에서 누런 강아지 한 마리를 봤다. 녀석은 내가 다가가자 꼬리를 다리 사이로 밀어 넣으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사람을 좋아하던 깜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경계심은 곧 이 세상에서 입은 상처의 깊이이자 거리였다.
그 유기견의 겁에 질린 눈망울은 내게 묻고 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찌 이리도 무책임한가. 누군가에게는 한때 세계의 전부였을 생명이 왜 차가운 빗줄기 아래 버려져야 했을까. 유기는 장소를 옮겨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명이 가졌던 온 세상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가혹한 파괴다. 길 위의 유기견들은 인간의 이기심이 투영된 일그러진 거울이다. 나는 그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차마 녀석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그치고 달이 떴다. 놀이터 모래밭에 몸을 뉘었다. 멀리 아파트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들이 따뜻해 보인다. 예전에 내가 살던 집도 저런 빛을 내뿜었을 것이다. 누군가 던져준 소시지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 보지만, 정작 채워지지 않는 건 위장의 포만감이 아니라 주인의 체온에 대한 갈증이다.
그날 아침, 한적한 계곡으로 떠났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신이 났다. 온 가족이 함께 차에 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벌레 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들려온 자동차 엔진 소리. 나는 그것이 나를 두고 떠나는 소리인 줄 몰랐다. 처음엔 그저 숨바꼭질이 길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눈을 감으면 환청처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리 와, 우리 강아지.”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허공에 발을 내디딘다. 나를 버린 당신을 미워하기엔, 당신과 보냈던 햇살 아래의 낮잠이 너무나 달콤했다. 우울증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버려진 우리에게도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오직 한 사람을 향해 흐른다. 누구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 이 거리에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다.
깜지가 우리에게 준 것은 위안이 아니었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의 엄중함,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길 위를 떠도는 유기견들에게도 한때는 다정한 이름이 있었고, 누군가의 세상을 밝히던 빛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버리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인성을 내버리는 것과 같다. 생명의 가치는 그 존재가 주는 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숨 쉬고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공원을 걸으며 기도한다. 길 위의 젖은 발자국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무지개다리 저편에서 기다리는 그 순수한 영혼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남기를.
허공을 응시하는 유기견의 두 눈에 달빛이 고인다. 그 눈물은 곧 나의 눈물이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류애의 마지막 불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