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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May 12. 2021

세조는 왜? 싸이코 공신을 처벌하지 못했을까...

제7대 왕 세조

세조 (조선의 7대 왕, 수양대군)의 프로필을 알아보자.

출생 : 1417 년 (604년 전에 태어남)

신체 : 형인 문종과는 다르게 무예에 능했다고 함. 선대의 무인 기질을 물려받아 기골이 장대 했을 것으로 추정. (근거 없는 필자 생각)

소속사 : 조선왕조

가족 : 아버지 세종의 8남 2녀 중 둘째.

학력 : 수양대군 시절, 왕족이었으므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됨. 글씨를 잘 썼다고 함. 그가 썼다는 친필이 현존함.

데뷔 :  38세 되던 해에 조카의 왕위를 빼앗으며 필드에서 주목받기 시작.


활동 : 1455년 ~ 1468년 (13년) , 왕권 강화 정책, 세종과 문종이 이뤄놓은 문화를 폭삭 무너뜨리고 수많은 인명 살상.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왕조는 꼬이기 시작하고 공신 세력 (한명회, 홍윤성 등)을  통제하지 않아 훗날 조선 당쟁의 시발점인 훈구세력을 키우는 빌미를 만듦. 오늘날 정치판 싸움을 보면 당쟁의 연장선상이 아닌가 생각됨.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의 이정재*

<<대표적 활동 사항 요약 >>

1. 단종(조카)의 왕위를 빼앗음

2. 단종 복위를 주장한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을 거열형으로 죽임.

*거열형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서 죽이는 형벌)

3. 형제인 안평대군, 금성대군까지 죽이는 등 친족을 죽이는데 서이 없었음.

4. 악몽을 꾼 다음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물이 넘치고 습한 터로 이장을 시킴.

5.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을 무참히 죽이고 식솔들은 하루아침에 공신들의 노비로 만듬.

6. 결정적 과오. 공신 세력을 누르지 못함( 당쟁의 원초), 소극적인 화기 개발(총통 군 해체,  반대세력이 힘을 키울까 봐 두려움), 부사관 제도 폐지 (중간 관리자가 없으므로 전쟁시 장군이나 장교가 죽으면 일시에 전력이 약해짐)

7. 왕권강화 정책으로 6조 직계제,
경제정책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지적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에 있는 사람에게만 토지를 주어 국가 재정을 늘림.

8. 실록에 의하면 음악적인 감각이 뛰어나 악기를 잘 다뤘다고 함. 16 정간보, 오음 약보는 오늘날로 말하면 악보인데 당시의 음악을 후대에 전할 수 있어서 음악 역사학으로는 높이 평가됨.

<다섯 글자로 표기한 오음 약보는 세조(世祖)가 16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했을 때 음의 높낮이를 표기할 수 있도록 고안한 기보법이다.>  

            - 한겨레 음악 대사전 -

사망 : 1468 (51세)
불면증과 피부병으로 시달림. 나병(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둘째 아들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하루 만에 사망함.

인과응보( 因果應報)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그릇된 행위를 저지른 대가로 받는 나쁜 일>
            
                 - 시공 불교사전 -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말 그대로 패륜을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그 원한이 세조가 살아생전 몹쓸 피부병 (문둥병)으로 나타났나 보다.

세조는 문종 시기에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아무도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 생각 못했다고 한다.) 형이 죽자 숨겨놓은 야망을 드러낸다.

계유정난은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 사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세종과 문종이 만들어 놓은 정치, 문화, 군사적인 업적들을 계승시키지 못했다. 세조의 피를 이어받은 후대의 왕들 또한 무능한 왕 (선조 - 임진왜란, 인조 - 삼전도의 굴욕)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또한 공신 세력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은 것이 세조의 큰 실수로 남았다. 이는 쿠데타로 집권을 했지만 공신 세력을 강하게 눌러서 토사구팽 시키고 왕권 강화를 한 태종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세조의 공신들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부패 정도가 제일 심각했다. 대표적으로 한명회와 홍윤성을 들 수 있다. 한명회는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고 필자는 희대의 사이코패스라는 홍윤성의 일화를 주목해본다.

홍윤성은 조선시대에 오늘날 국무총리와 같은 영의정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흔히들 1인 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한다. 모든 신하가 그의 아래에 있고 위로는 임금 한분만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의정 홍윤성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연쇄살인마, 사이코 패스라고 불린다.


그의 행적을 잠시 살펴보자. 막강한 권세를 누린 홍윤성은 자기 집 앞을 감시하며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을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패도록 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죽여버리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하니 백성들이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다고 야사는 전한다.

사후 오늘날 남겨진 홍윤성의 무덤은 향토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도굴당하고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망을 샀으면 현대의 사람들 조차 그를 인간쓰레기 취급을 하겠는가.

*드라마 한명회에서 홍윤성역의 김형일*

세조가 홍윤성이 그토록 백성을 못살게 굴었어도 벌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 이유가 뭘까..

홍윤성은 양민 출신이며 1450년에 과거급제를 했으나 사복시에 발탁되었다.

* 사복시 (司僕寺) : 임금이 타는 수레·말·마구·목축 등을 관장하였다.

그는 말단 관리인 한성 참군을 지냈는데 수양 대군이 거사(반란)를 함께 할 의향이 있는지 떠보자 망설이지도 않고 즉시 가담했다.

계유정난이 있었던 그날, 의외로 군사들이 따르지 않자 머뭇머뭇하고 있던 수양대군에게 결단하도록 부추겨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수양대군이 의기투합하자고 했을 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나섰다는 것, 반란을 도모하던 날 망설이던 그를 적극 도운 점. 그래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세조는 홍윤성을 어쩌지 못했다.

군량미 30만 석을 횡령한 것도 눈감아 줄 정도였다. 심지어 술자리에서 자중하지 않으면 여러 죄를 물어 극형에 처하겠다는 세조의 엄포에도 " 주상께서는 조카를 죽이시지 않았느냐 "고 여유롭게 말하자 세조는 남다른 배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세조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말조차도 그냥 넘겼다 하니 참 이상한 일이다.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할 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던 사람이 말이다.

세조는 명분이 없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를 도와서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공신들이었지만 정통성이 없는 왕을 공신들이 겉으로는 " 네. 네 " 하면서 속으로  인정할 수 있었을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공신들은 세조를 이용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조도 어쩔 수 없는 공신들의 힘이 있었기에 비리와 부패를 일삼아도 왕은 눈감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역사책에는 세조가 이룬 왕권 강화의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명회나 홍윤성의 권력이 남달랐던 걸 보면 반란으로 집권한 왕권의 한계가 분명 있어 보인다.

그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릉이다. 인근에 광릉 수목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  아! 명당, 명당 하는데 이런 곳이 명당이구나.. ' 실제로 광릉이 명당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앞이 트여서 훤하며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세조의  묘를 보여 떠오른 느낌이다.

세조는 자기가 죽거든 시신이 빨리 썩어야 되니(풍수지리적 이유) 묘실과 석곽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한다.  왕릉이 만들어질 때 많은 돈과 백성들이 동원되어 고생을 했는데 간소한 능을 조성함으로써 비용과 백성의 수고를 덜어줬다.


혹,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광릉 수목원에서 데이트하는 분이 있다면  옆에 있는 광릉을 관람하면서 은근히 해박한 지식을 살짝 자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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