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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May 05. 2021

드라마에서 처럼 문종은 나약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제 5대 왕 문종, 이향(李珦)


네이버 화면이다 ' 톡톡 톡톡 ' 자판을 두드린다. 검색어는 조선왕조 실록. 놀랍다.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조선시대 관련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천천히 읽어본다. ' 아하 ~ 그랬구나. 그랬어. '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조선왕조 실록은 1대 왕( 태조) ~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을 연월일 순서로 기록한 역사서다.


쉽게 말하자면 년 월 일 별로 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쓴 거다.



오늘은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인 문종을 소개한다. 세종 대왕의 아들인 그는 38세의(1414 ~ 1452 ) 나이로 단명을 했다. 재위 기간은 2년이다.


하지만 왕으로 있던 기간이 짧다고 해서 그가 이룬 업적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종은 그의 생애 대부분을 세자로 있으면서 아버지 세종을 보필했다. 특히 세종 말년에는 실질적인 군주로서 많은 일들을 했다.


문종은 실제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유약한 이미지의 왕이 아니었다. 수양대군이 문종에게 순응하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고 한다.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의 적장자(맏아들)로 왕위 계승을 받았으므로 왕권이 강했다.


그는 하급 관리들에게도 윤대를 허락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정책을 펴 나갔다. 측우기 하면 장영실이 떠오르는데 문종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군사 무기인 화차 (火車)는 문종 때 만들어졌다.


그렇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신기전 화차를 말하는 거다. 영화에서 봤지 않았는가. 수레 위의 하늘을 향한 화살들이  ' 쏴 아악 ' 적들을 향해 발사되던 무기 말이다. 한 번에 100개의 화살이 날아갔다고 한다. 현대로 치면 다연발 로켓포라 할 수 있다.


<<화차 (火車)>>


15세기에 발명하여 만들어진 화약 무기. 수십 개의 화살을 연이어 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 국어사전 -

화차는 전해져 오는 건 없으며 문헌과 사료를 참고로 해 다시 만들었다. 신기전이 복원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채연석 박사는 로켓 공학 박사이자 고화기 연구자다. 그의 저서 <로켓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실제 경험담이 나온다.


화차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부품 조립에 문제가 생겨 여러 날 고민을 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왕릉에 혹시나 화차에 관한 자료가 있을까 갔다가 찾지 못하자 문종의 왕릉 앞에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서 화차를 봤고 다음 날 그대로 만들어 봤더니 문제가 해결되고 제대로 복원을 했다.

채 박사의 간절함이 하늘에 계신 문종을 감동시켰나 보다.

문종의 능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16에 있다. 현릉이다. 지도로 보면 서울시 노원구와 중랑구 사이의 동쪽이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배웠다시피 문종 다음으로 왕위 계승은 세조(세종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인 단종이다.

문종의 단명으로 후계자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단종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 이야기는 단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핵심은 어린 왕을 보호하며 그가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해줄 조력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록을 읽다가, 음... 흥미로운 내용을 읽었다. 문종은 3명의 왕후가 있었는데 첫째 부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둘째 부인은 동성애에 빠졌으며 셋째 부인은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욕열로 사망했다. 문종은 부인 복이 없었고 홀아비로 지냈다.

다음은 둘째 부인인 봉씨의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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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두 부인이 사리의 대체를 알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이를 내버려 두었는데, 요사이 듣건대, 봉 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이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 ’고 하였다. 어느 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를 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 ’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서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빈을 불러서 이 사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쌍이 단지와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에만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곧 저희들의 하는 짓이오며 저는 처음부터 동숙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마는, 여러 가지 증거가 매우 명백하니 어찌 끝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 또 저들의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던 일을 또한 어찌 빈이 알 수 있었겠는가. 항상 그 일을 보고 부러워하게 되면 그 형세가 반드시 본받아 이를 하게 되는 것은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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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두 번째 부인 봉 씨는 거침이 없었고 동성애를 즐기며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까지 있었다고 실록의 기록은 전한다.

결국 궁에서 쫓겨난 씨는 아버지 여가 허리띠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결을 했다는 야사가 정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는 딸이 폐서인이 되기 3개월 전에 세상을 등졌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과는 달리 무예도 뛰어났고 건강했으나 직접적인 사망의 원인은 독살설도 있지만 실록의 기록에 근거하면 등창(종기)때문이라한다.

오늘날에야 종기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 의술로는 죽음까지 갈 수 있는 종기를 치료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왕의 몸에 칼을 댄다는 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원인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지 못했다.


역사 교과서에 실린 문종의 이야기는 단명, 아들 단종, 몇 줄 나오지는 않지만 그의 짧은 생애에도 참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5대 왕 문종에 대해 요약해본다.

1. 세종의 맏아들 30년간 아버지를 세자로서 보필, 세종의 말년 실질적인 군주의 역할. 드라마에서 처럼 나약한 왕이 아니었음.

2. 측우기 (문종의 아이디어), 신기전 화차는 그의 작품.

3. 세명의 부인중 두 번째 부인의 기록이 특이함 (동성애)

4. 등창 (종기)로 인한 건강 악화. 38세의 나이로 단명함.


과거의 시간 속에 만약에 ~라면이라는 생각을 넣어본다. 문종이 일찍 죽지 않고 10년만 더 살았었다면 우리 역사는 180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우선 그의 아들 단종이 안정적인 왕위를 이어받아 세종이 일궈낸 문화를 더욱 발전시켰을 거다.


문종대에 만들었다는 신기전 화차는 그야말로 대단한 신무기였다. 그는 학문뿐 아니라 병법과 전쟁무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상상해보라. 수천 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적진 영에  떨어졌을 때 전쟁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겠는가. 문종이 화차뿐 아니라 각종 신무기를 만들어 후대까지 전해졌다면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하랴..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었다면..  뒤돌아 보면 참 아쉬움만 가득하다.


*참고 자료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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