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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May 02. 2021

제가 잘 몰랐던 세종대왕의 뒷 이야기들입니다

제4 대 왕 세종 ( 이도)


조선 왕조의 가장 으뜸이라 하면 세종 대왕이다. 아버지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이다.

태종은 일찌감치 맏아들 양녕대군을 10살 때 세자로 삼았지만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적응을 잘하지 못해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 )으로 세자를 바꾼다.

세종의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그의 형인 양녕대군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후손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소설가 이외수, 가수 이상민, 이승기 등이 있다. 어?... 맞다. 여러분 머릿속에 잠깐 떠오른 그분. 룰라의 이상민 말이다. 이분들은 양녕대군 파라고 한다.


양녕대군은 서예에 능했다. 남대문의 현판인 숭례문이란 글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남대문 앞에서 명필 추사 김정희는 이 글을 볼 때면 넊을 잃고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고 전해진다. 


이 현판이 2008년 남대문의 화재로 소실 될 뻔 했는데 다행히도 서울 중구청 공무원의 재빠른 대처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세종은 1397년에 태어나 1450년까지 5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재위 기간은 32년이었다. 이름은 이도(李祹)다.

왕으로서 이룬 업적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필자는 그의 뒷이야기 몇 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첫 번째로 세종의 건강 문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고기를 즐기고 책 읽기를 좋아해서 활동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 당뇨병과 시력저하로 건강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할아버지(이성계)와 아버지(이방원)
육식을 즐겨도 무인의 기질이 있어서 사냥이나 활쏘기, 격구 등을 통해 건강관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하도 책만 읽어 태종이 환관을 시켜서 책 한권만 남겨두고 서재의 책을 모두 감추었더니 남은 책 한 권을 반복해서 100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책과 학문에 몰두하는 정적인 활동을 하면서 음식 또한 고기를 좋아하는 편식을 했다.



오죽했으면 태종이 자신이 죽어서 3년상을 치를 때 세종이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 당시 예법은 상주에게 육식은 금지되어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당뇨 등 성인병으로 시달렸던 세종이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관리를 잘했더라면 조선 사회 전반적인 문화가 더욱 발전되지 않았을까. 물론, 3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일궈낸 업적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 하다.


더욱 안타까운건 세종 > 문종 > 단종 >세조로 이어지는 왕위 승계 과정에서 세조가 무력으로 왕권을 찬탈 했던일이다.


세종이 좀더 살아서 아들 문종과 단종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었더라면 세조 이후로 이어지는 우리 비운의 역사(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가 그렇게 까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는 방송인 유병재가 말한 설렁탕이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설렁탕은 크게 2가지 유래설이 있다.

선농단에서 왕이 제사를 지낸 후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소의 뼈를 우려낸 하얀 국물에 밥을 말아 나눠 준 탕에서 처음엔 선농탕이라 불리다가 설렁탕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록에도 없고 조선 시대에는 소를 귀하게 여겨 그랬을 리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한 가지는 몽골 기원설인데 사학자이며 시인인 육당 최남선이 몽골의 음식 술루( 물에 소를 삶아 먹은 음식) 란것이 고려를 거쳐 설렁탕의 어원이 되었다고 했다 한다.



세 번째로 세종은 식욕도 많지만 성욕 또한 왕성했던 걸로 보인다. 7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18남 4녀가 있었다. 첫 번째 왕비에게는 8남 2녀를 낳았고 그들은 세종을 닮아서 능력이 출중했다.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18명의 아들을 둔 기록을 남겼다.

그가 성병인 임질에 걸렸다는 기록도 있는데 당시의 임(淋)은 현대의학으로 보면 배뇨 장애의 총칭이었고 비만과 당뇨로 인한 요도 질환인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번째는 세종의 능에 관련된 이야기다.
지도에 경기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901-3을 입력한다. 여기는 세종 대왕릉이며 영릉 이라고도 한다. 두 분의 임금을 모신 곳이다. 다른 한분은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 (1619∼1659)이다.

앞서 태종 (이방원) 편에서 헌인릉이 헌릉 (조선 2대 왕 태종 ), 인릉 (조선 23대 왕 순조)를 모신 능(陵)인 것처럼 여기도 두 분의 왕이 계신 곳이다.

세종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은 왕이다. 무덤도 조선왕조 최초로 왕과 왕비가 함께 합장되었다. 원래 세종의 능은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태종의 능 헌릉에 있다가 세조 때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지금의 여주로 이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세종의 어진 논란이다. 어진은 왕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다.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익종의 어진만 전해진다.


그 이외의 왕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표준 영정을 만들라는 지시에 의해 그려졌다.

당시 화가인 운보 김기창이 그렸는데 그의 얼굴과 표준영정 세종 대왕의 얼굴이 흡사하다고 지금까지도 말이 많다. 실제로 보니 비슷하기도 하다.


훈민정음이 처음 나왔을 때 기득권층의 반대가 심했다. 이는 백성들이 읽고 쓸 줄 알 게 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작아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연산군 때는 백성들이 자신의 잘못을 글로 쓴 걸 보고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다고도 한다.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자를 쓰던 한계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아마도 우리만의 문자가 없었다면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 재위 32년 동안 그와 함께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이뤄낸 조상들 또한 대단하다. 장영실, 황희, 맹사성, 성삼문 등이 있다.

세종의 백성 사랑을 잘 나타낸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으로 이 글을 마친다.

"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문 글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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