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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Apr 22. 2021

억지로 왕이 된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과

제2 대 왕 정종 ( 이방과)


후릉(厚陵)을 소개한다. 이곳은 조선왕조 제2대 왕인 정종을 모신 곳이다. 현재 북한의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다음은 구글 도로 본 후릉의 위치다.

이분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다. (1357~1419·재위 1398~1400)  62세에 돌아가셨고 왕위에 오른 건 2년 동안이었다.


왕위 세습은 보통 적장자, 즉 맏아들에게 물려주지만 둘째인 이방과(정종)는 원하지 않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과정1차 왕자의 난이 있었다. 그 배경을 살펴보자.


조선이 건국되고 세월이 흘러 태조는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이성계의 아들은  첫 번째 아내에게 6명, 두 번째 아내에게 2명이 있었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맏아들인 방우가 첫째 이므로 세자가 되어야 했으나 태조는 둘째 부인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으려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자. 태조에게는 군주의 기질이 충분한 다섯째 이방원이 있었지만 굳이 둘째 부인의 아들인 방석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  이유가 뭘까?


태조는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을 오히려 미워했다. 


조선 건국 직전으로 올라가 보자. 이방원이 아버지의 눈밖에 나기 시작한 건 정몽주를 죽이고 난 후였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세력의 온건파인 정몽주와 급진파인 이성계는 대립을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비록 반대파였지만 , 무를 동시에 갖춘 정몽주를 아꼈다. (정몽주를 문인으로 알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무의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그를 아낀 건 정몽주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바라본 그의 사람됨과 능력을 알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아끼는 사람인 정몽주를 방원은 왜 죽여야 했을까..


고려말 온건파 (정몽주)와 급진파 (이성계)가 서로 견제를 하던 중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때 이성계가 병석에 누운 틈을 탄 급진파(정도전 등)는 온건파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되면서 불안했던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여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해 방원을 꾸짖고 큰 실망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시작됐다.

          -  KBS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


배다른 아들 중 제일 막내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니 조선을 건국하는데 목숨을 내놓고 아버지를 도우며 싸웠던 이방원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는가.


마침내 제를 죽이는 골육상잔 (骨肉相殘 )의 비극이 일어났는데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아버지가 세자로 정한 동생을 죽이자 태조와 이방원 두 부자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 건국의 핵심 인물인 정도전도 이방원에 의해 죽는다. 1차 왕자의 난은 왕권을 둘러싼 왕자들 싸움 이기도 하지만 정도전 세력과 이방원의 대립이기도 하다. 


태조가 8명의 아들 중 막내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건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둘째 부인을 너무 사랑했고, 앞서 말한 이유로 방원을 싫어했으며 정도전의 후원도 있었다.


연려신기술의 기록의하면 둘째 방과가 왕위에 오른 내용이 있다. 방석과 정도전을 죽인 방원을 보고 태조는 크게 진노하며 " 너는 나를 죽이고 난 후에야 왕위에 오늘 것이다. " 라며 식음을 전폐했다.


7일을 통곡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이방원은 둘째 형인 방과가 왕위에 오를 거라 하며 애원을 했다. (이후 둘째 형인 방과는 이방원을 무서워하며 허수아비 왕이 된다. 첫째인 방우는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었고 일찍이 술병으로 죽었다.)


태종실록과 정종 실록을 보면 이 시기에 태조 (이성계)의 심경이 잘 기록되어 있다.


권력을 위해 형제까지 죽여야만 하는 역사를 보니 참 무섭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종에 의해 꽃을 피우기까지 사연이 참 많고도 길다.


정종에 대해 잘 몰랐던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정종은 사후 262년이 흐른 후 숙종 때가 돼서야 묘호를 받는다.

                  - 북한에 있는 정종의 릉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이라는 왕의 이름은 묘호다.


묘호란 왕이 돌아가신 후의 종묘에 올리는 존호(尊號)다. 정종은 당시 사대 국인 명나라의 묘호인 ' 공정 '을 받았고 조선 내에서 인정받는 ' 정종 ' 이란 묘호는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 받았다.


이유를 알아보자. <세종실록> 1419년 11월 29일에 이런 내용이 있다.


큰아버지인 정종의 사후 묘호를 내려야 할 때 세종은 명나라에서 내려주는 묘호는 허락할 수 있으나 조선 조정에서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다고 한다. 이건 정종의 정통성을 인정 못한다는 세종의 생각이다.


둘째인 방과는 본인도 오르기 싫어했던 왕위에 오르고 2년 동안 동생 이방원의 눈치만 보고 임금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나라를 처음 개국한 왕에게 태조, 그 뒤를 이은 적통 임금을 태종이라 했다. 명나라를 사대 했던 조선이었다. 당시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태조 - 태종 (이방과, 큰아버지 ) 순으로 되는 게 싫었던 거다.


이방과는 태조의 아들이긴 하지만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자신의 아버지 이방원이 태종이 되어야 한다는 세종의 의중이 담겼다.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이 먼저 나서서 정종의 묘호를 올릴 수 없다고 하니 후대의 왕들 또한 뭔가 찜찜하지만 어쩔 수 없어 오랜 세월 ' 공정 왕 '이라 했다.


262년 만에 숙종이 복원을 해주는데 정종의 (定宗) 정자는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定)’는 뜻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2대 왕 정종까지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


1. 조선 건국 이성계 (태조 )


2. 다섯째 아들 이방원, 정몽주를 죽임.


3.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


4.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방석, 방번, 정도전까지 죽음.)


5. 둘째형 방과가 2년동안 왕의 자리에 오름.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음 )


6. 세종에게 큰아버지 방과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함. (262년이 흘러서 정종이라는 묘호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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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왜 그리도 방원을 미워했을까..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으니. 이성계가 처음부터 방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옳지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물론 태조의 판단을 흐리게 할 만한 여러 정황들( 정몽주의 죽음, 정도전 세력, 둘째 부인과의 관계)이 있었다.


그러나 태조는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조선 건국의 중요 역할을 한 이방원을 세자 책봉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보듬어 줘야 했다. 방원 역시 자신을 옥죄어오는 세력에 대항하며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반역을 하지 않았을까.


정도전은 개국공신으로 조선 건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민본주의를 (즉, 백성이 근본) 바탕으로 한 재상 중심의 국가운영이 되는 나라를 꿈꾸었고 이방원은 왕권중심의 나라를 생각했다.


이 부분은 조선 왕조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이어집니다. -



*참고 자료 *



정종의 정통성 (경향신문 보도 내용)

http://naver.me/F6mqIeOV

















 



















이전 01화 그렇구나, 이성계의 능이 거기에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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