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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작가 Jan 16. 2022

문익점은 목화 씨를 정말 붓뚜껑에 숨겨서 가져왔나...

초급 14번. 한국사 기출문제, 목화 종자는 누가 가져왔을까요?

*다양한 주제의 한국사속, 숨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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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면실유(綿實油), 지금은 쓰지 않지만 참치 통조림을 열 때 나온 기름이 목화씨에서 나온 기름이다.


*목화의 재배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서민들에게 목화솜으로 만든 솜옷은 추운 겨울을 따뜻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의복이었다.


*문익점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어릴 적 우리가 배웠던 붓두껑과 목화씨에 대한 통념이 사실과는 다를 수 있음을 발견했다.


*필자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익점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다.


*과거의 사건, 더군다나 600여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완벽히 알 수 있단 말인가.. 문익점과 목화씨에 관한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아내가 사 온 앙골라 목도리가 있습니다. 토끼 털로 만든 거죠. 슬쩍 만져보니 부드럽고 목에 살짝 둘러봅니다. 엄청 따뜻합니다. 둘째 딸이 올겨울 외출할 때 꼭 챙기는 준비물이죠.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들은 부잣집이나 입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목화는 일반 서민에게 추운 겨울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익점과 목화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있네요.


문익점!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목화다. 글쎄?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다. 필자는 추운 겨울날, 어릴 적 시골 큰집 사랑방에서 포근하고 따뜻했던 이불을 덮고 잤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이불은 사촌 형이 결혼할 때 장만한 목화솜 이불이었을 거다.


목화 (木花)는 겨울철 보온성이 뛰어난 솜을 얻을 수 있는 식물이다. 씨는 까맣고 겉껍질이 흰색의 털로 바뀐다. 씨를 빼고 솜털을 모아 솜을 만들고 씨는 짜내서 식용 기름을 만든다.


이 기름을 면실유(綿實油)라 말한다.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주로 식용유나 샐러드유로 사용됐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참치 통조림을 열 때 나온 기름이 목화씨에서 나온 기름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1360 년)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가져와 그의 장인과 재배를 했다. 문익점이 심은 건 모두 실패했지만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가 꽃이 나서 목화 종대 씨를 얻었다. 이 씨들을 기반으로 삼아 점점 재배하는 곳이 늘어났고 10년 후 전국으로 목화가 퍼졌다.


목화의 재배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동해 바닷물이 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조선시대는 오늘날보다 더 추웠으리라 추정된다. 갖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인데, 주로 상류층이 입었다. 일반 서민들에게 목화솜으로 만든 솜옷은 추운 겨울을 따뜻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의복이었다.


학계에서는 문익점 이전의 시대에 우리나라에도 목화가 있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다만 문익점이 중국에서 가져온 목화씨는 개량종이어서 한반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고도 한다.

문익점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목화가 널리 재배될 수 있었고 그의 공로는 크다. 그러나 문익점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어릴 적 우리가 배웠던 붓두껍과 목화씨에 대한 통념이 사실과는 다를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밀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숨겨서 가져왔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지도와 화약이 반출 금지 품목이었지 목화는 아니었다는 거다.


필자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익점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다.


고려사 > 권 111 > 열전 권제 24 > 제신(諸臣) > 문익점(文益漸)은 진주(晋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옮겨 정언(正言)이 되었다. 사신이 되어 원(元)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면서 덕흥군(德興君)에게 붙었다가 덕흥군이 패하자 곧 돌아왔다.


목면(木緜)의 종자(種子)를 얻어 돌아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처음에는 배양(培養) 하는 기술을 알지 못하여 거의 말라죽고 다만 1줄기만 남았는데, 3년 만에 마침내 크게 번식하였다.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윤 3월 1일 경인 2번째 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고(故) 간의 대부(諫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木緜種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 집[村舍]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進上) 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이점이 준 것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공덕(功德)이 있는데도 응보(應報)를 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고..


남겨진 역사서의 두 기록 어디에도 문익점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서 가져왔다는 말이 없다.

그러면 도대체 문익점과 붓두껍의 일화는 어떤 근거로 알려졌을까.


다음은 규장각 도서에 소장되어 있는 쓴 『목면 화기(木棉花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저자와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어떻게 가져왔고 재배했는지에 대한 경위를 쓴 거다.


요약은 이렇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길가의 밭에 눈송이 같은 꽃이 있어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속에 씨앗이 있었다.


뭉실뭉실한 털이 요긴하게 쓰겠다 싶어서 여러 개를 따서 챙겼다. 그러자 밭의 주인인듯한 노인장이 다가와 이건 국가에서도 중히 여겨 다른 나라 사람이 가져가면 자신도 큰 벌을 받는다며 빼앗으려 했지만 문익점은 이를 뿌리치고 가져왔다.


목화씨를 가져온 경위에 대해 쓴 책에도 붓두껍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필자도 후대의 누군가가 문익점의 이야기에 살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뿐 붓두껍과 문익점의 설에 대해 부정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사건, 더군다나 600여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완벽히 알 수 있단 말인가..

문익점과 목화씨에 관한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1. 방적기는 목화를 가공해서 실을 만드는 기계다. 옛날에는 ' 물레 '라고 불렀다. 왜 물레라고 이름 지었을까? 문익점의 아들의 이름이 문래라 거기서 따온 거다.


2. 서울시 영등포구의 문래동 (文來洞)을 한자 그대로 약간 과장해서 해석해 보면 문익점이 온다는 뜻이다. 실제로 문래동에는 방직공장들이 많았다.


3. 미국의 노예들이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가 목화씨에서 나온 기름으로 닭을 튀겨 먹었는데 그게 바로 ' 프라이드치킨 ' 이 된 거다.


말은 지어내기에 따라 그럴듯하게 변할 수도 있다. 위 세 가지 설은 재미로 떠도는 것일 뿐이다.


<마무리 글>


어찌 되었건 문익점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따뜻하고 포근한 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게 됐다. 목화의 꽃말은 ' 어머니의 사랑 '이다. 그래서 결혼할 때 혼수로 목화 이불을 한 모양이다.


목화솜의 수명은 대략 100년 까지라고 한다.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솜을 틀어주면 다시 ' 뽀송뽀송 ' 하게 살아난다. 요즘 혼수 물품에 목화 이불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꽃말처럼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목화는 문익점이 우리나라에 가져와 재배할 때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백성을 위한 사랑.. '


-  참고 자료 -


*고려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한국민족 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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