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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군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초급 15번. 한국사 기출문제, 위화도 회군 조선의 개국을 알리는 신호탄

by 임세규


*다양한 주제의 한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셔요. *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위화도 회군(1388)의 배경과 그날 이후 2018년, 위화도를 둘러싼 이야기를 살펴보자.


*2018.11.16일 자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북, 압록강 위화도에서 비밀리에 석유탐사


*위화도 회군은 고려말 1388년에 명나라를 치러 요동으로 갔던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임금의 명을 어기고 군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최영 <전쟁이다. 먼저 치자 >

이성계 <아니다. 지금은 안된다>


*명을 치러 요동으로 가면 질 것이 뻔한데 진군을 해야 하나, 회군을 하면 분명 그 책임을 물어 화를 면치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고, 결정적으로 철령위 이북 땅을 자기네가 차지하겠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하니 조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위화도 회군은 철저한 계획에서 이뤄졌을까요?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이른 아침 고요히 위화도를 덮은 안개가 걷히며 서서히 드러나는 그들은 오로지 ' 한장군의 명 '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가자~ 우리는 돌아간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습니다. 장마가 오기 전 서둘러 압록강을 넘어가라는 우왕의 재촉에 일부러 위화도에서 물이 불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올 명분을 만들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군을 할 때 진군 속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보다 4배 정도 빨랐다고 하니 말입니다.


또 다른 시각은 이성계의 명나라를 향한 ' 사대주의 ' 말인데요. 그의 요동정벌 4대 불가론의 첫 번째, 작은 나라 (고려)가 큰 나라 (명)을 쳐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그걸 증명해준다는 말이지요.


참 재밌군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글을 쓰면서 밥을 먹다가도 양치를 하다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철저한 계획에서 이뤄졌을까요?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고려말 상황에 대해서 묻는 문제다. 홍건적이 침입했고, 신진 사대부가 활동했다.


1. 척화비, 2. 균역법 3. 장용영 설치 4. 위화도 회군.


정답은 당연히 위화도 회군이다. 각 용어 들은 핵심만 정리하고 위화도 회군(1388)의 배경과 그날 이후 2018년, 위화도를 둘러싼 이야기를 살펴보자.


홍건적(紅巾賊) >


중국 원나라 말기에 일어난 반란군이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매고 있어서 홍건적이라 불렀다. 1359년과 1361년 2번 고려로 쳐들어와 서경 (평양), 개경 (개성)이 함락되었으나 수복됐다. 개경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이성계 장군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신진 사대부


단어 그대로에서 풍기는 느낌이 오지 않는가.. 뭔가 개혁의 이미지라고 할까.. 오늘날 진보라 보면 되겠다. 고려말 권문세족의 부패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들고일어난 젊은 유학자들을 말한다. 이성계와 손을 잡고 조선의 중심세력이 된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말 1388년에 명나라를 치러 요동으로 갔던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임금의 명을 어기고 군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중국과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황을 살펴본다.


- 중국과 고려와의 국제 관계 -


고려말 중국 상황은 원나라 ((1271 ~ 1368) > 명나라 (1368 ~ 1644)로 교체되는 시기였다. 역사 속에서 나라가 망해갈 때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있다. 그건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백성들의 삶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다는 거다.


원나라 역시 마찬 가지였다. 원에서 명으로 가는 교체시기에 홍건적의 난 (1351)이 일어났다.


* 원나라 > 홍건적의 난 > 명나라*


홍건적을 이끌며 주도했던 인물이 주원장이다. 그가 명나라를 세운다.


- 고려말 국내 정황 -


권문세족의 부패와 횡포로 백성들은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고 북쪽은 홍건적이 남쪽은 왜구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홍건적은 2번이나 고려로 쳐들어와 공민왕이 수도를 떠나 피신하기까지 했다. 홍건적은 2차 침입(1361) 때 거의 전멸을 당했으나 고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고려와의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본토에 있던 홍건적은 마침내 명나라를 세운다. 원. 명 교체기에 일어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국력이 쇠퇴한 고려는 회복기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명은 그동안 힘이 더 세진다. 이윽고 고려는 명나라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고, 결정적으로 철령위 이북 땅을 자기네가 차지하겠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하니 조정의 여론이 들끓었다.


최영과 이성계를 필두로 대립이 시작됐다.

최영 쪽은 명나라를 우리가 먼저 공격하자고 했고 이성계 쪽은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고려 >>>>>>>>>>>>>>> 명나라

최영 <전쟁이다. 먼저 치자 >

이성계 <아니다. 지금은 안된다>


여기에서 시험에 자주 나오는 ' 이성계의 4대 불가론 ' 이 등장한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면 안 된다.

2.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면

안 된다.

3. 북쪽으로 출정을 하게 되면 왜구들이

쳐들어 올 거다.

4. 장마철의 전투에서는 활의 아교가 녹아

내리고 역병이 창궐할 것이다.


두 의견의 팽팽한 대립에서 이성계가 밀려 결국 군사를 이끌고 요동정벌을 나갔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진을 쳤다. 그러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계속되는 큰비와 식량은 제때에 공급되지 못했다. 탈영병이 속출하고 병사들의 사기가 말도 못 하게 떨어졌다.


이성계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 조정에 보고를 했으나 답신을 주지 않았다. 이에 상관이었던 최영 장군에게 거듭 회군을 요청했으나 며칠 후 온 답변은 ' 요동성으로 진군하라 ' 는 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 기사


태조가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에서 이때를 기록하고 있다.


5월, 대군(大軍)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르니, (중략)


신(臣) 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洲中)에 머물러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중략)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城)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전쟁을 이끄는 장군의 잘못된 판단은 자칫 병력 전부를 잃는 지경까지 만들 수 있다.


' 역지사지 ' 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라 는 뜻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 일거다. 내가 만일 이성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장군 회의에서는 다수의 생각들이 회군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전군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건 아니었다. 좌군은 조민수 장군이 맡고 있었다.

조민수는 조정을 대신해 이성계를 경계하는 역할을 하라고 보냈으나 결과적으론 이성계와 함께 회군을 함으로써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 태조가 휘하의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

하니, 군중이 떠들썩하였다.


민수(敏修)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單騎)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 "


조민수는 여기서 이성계가 돌아갈 것을 결정하자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모습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그를 이성계와 함께 요동정벌에 보낸 이유가 있었을 거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실록에 있다고 해서 모든 내용이 사실일 수는 없다.


어쨌든 회군은 결정됐고 요동 정벌군은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려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다.


왕은 진군을 명령했으나 이성계는 회군을 했다. 전제주의 사회에서 왕의 명령에 반기를 든다는 건 ' 죽음 '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보고 갈 생각이 있다. 위화도 회군은 계획된 계산이었을까.. 이미 계획했다면 언제부터였을까..


필자는 요동정벌의 찬반 논리에 밀려 결국 전장에 나선 이성계가 그때까지만 해도 역성혁명을 위해 회군까지 미리 계획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본다.


막상 위화도에 도착하고 보니 패전할게 뻔한 전장의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우왕과 실세인 최영 장군의 명령에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 명을 치러 요동으로 가면 질 것이 뻔한데 진군을 해야 하나, 회군을 하면 분명 그 책임을 물어 화를 면치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


' 그래 돌아가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차라리 최영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면 살 수 있다. '


마침내 이성계의 생각대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얻게 됐지만 견제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신진 사대부라고 해서 모두가 그를 따르는 건 아니었다. 목숨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아마도 그는 이때부터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근 500년, 정확히 말하자면 474년 동안 이어진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시작한다는 건 이성계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권력의 속성을 생각해보자. 힘 있는 자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붙는다.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고 또 다른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그를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 5만의 군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


쩌렁쩌렁한 이성계의 목소리가 위화도 회군을 알렸고 이는 조선왕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 척화비는 1871년 흥선 대원군이 쇄국을 다짐하며 세운 비석이다.


2. 균역법은 1750년 영조가 백성을 위한 세금 감면 정책이다.


3. 장용영은 1793년 정조의 호위병 조직으로 오늘날 청와대 경호처라 생각하면 되겠다.


<마무리 글>


2018.11.16일 자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 북, 압록강 위화도에서 비밀리에 석유탐사 '


영국의 지질학자인 마이크 레고는 북한에 상당한 양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었을 거라는 보고서를 2015년 발표했다고 한다.


실제 석유가 나왔는지 공식적인 발표가 없으니 알 수 없다.


훗날, 통일이 된다면 위화도 역시 남이섬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역사적인 장소 위화도에서 찍은 사진을 거실 벽의 액자에서 흐뭇하게 바라 볼 날을 기대해 본다.

- 참고 자료 -


*국사편찬 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99%8D%EA%B1%B4%EC%A0%81&ridx=0&tot=1707

*한국사 사전 1.

https://m.terms.naver.com/list.naver?categoryId=58670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mo/index.do;jsessionid=072D3272E8471512D784A37060E4855

*중앙일보 기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30261#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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