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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작가 Jan 24. 2022

아하!  천 원짜리에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이 있었구나.

초급 16번. 한국사 기출문제, 경복궁 근정전, 도산서원, 수어장대

*다양한 주제의 한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셔요. *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경복궁의 근정전 (勤政殿)은 ' 왕이 부지런해야 백성들을 잘 다스린다  ' 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한 정도전이 이름을 지었다.

*공자와 맹자의 후손이 도산서원을 찾아왔다. 전교당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행사가 열렸다.

유학 (儒學)은 중국의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전통적인 학문을 말한다. 공자와 맹자의 후손이 퇴계 이황의 신위 앞에 그를 존경하며 예를 표했다고 한다.


예전 1000원 짜리 지폐를 기억하는가. 1975년 ~ 2007년까지 32년동안 사용했던 구권 지폐의 앞면에는 퇴계 이황,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있었다. 이제 도산서원을 아주 쉽게 기억할 수 있겠다.

' 아 ~ 하 ~ 그 1000원 짜리~~ ' 


*수어장대 앞에서 참수된 이회가 맡은 남쪽 지역은 비록 여건이 좋지 않았고 공사 기간이 좀 더 길었지만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꼼꼼히 쌓은 결과, 승려들이 공사한 북쪽 지역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지만 남쪽 지역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딱딱하고 지루할 것만 같았던 우리 문화재를 공부해 가면서 한 점 한 점 마다 담긴 이야기들을 접했습니다.


남겨진 유물들을 보면서 선조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문화에 대한 창의성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군요.


이번 글은 지난 시간 고려의 문화재에 이어 조선의 문화재를 알아봅니다.

고려의 문화재를 고르는 문제다.


불상 >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회화 > 수월 관음도

석탑 > 월정사 팔각 구층 석탑

건축 (                  )


1. 경복궁 근정전

2. 부석사 무량수전

3. 도산서원 전교당

4. 남한산성 수어장대


-  조선시대 -


<경복궁 근정전 >


근정전 (勤政殿)의 이름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었다. 부지런할 : 근, 정사 (政事) : 정 자로 왕은 부지런해야 하고 천하는 부지런해야 잘 다스려진다는 ' 서경 ' 의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다.


궁궐의 가장 큰 행사인 임금 즉위식을 비롯한 대례 등을 거행할 때 이곳에 신하들이 모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걸 흥선 대원군이 다시 지었다.


광화문을 들어서서 앞으로 쭉 흥례문 >> 영제교 >> 근정문 순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좌우로 어깨를 쫙 편 듯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근정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마당 앞에는 품계석이 있다. 맨 앞줄을 보면 정일품 (正一品)이란 한자가 새겨져 있다. 길 중앙을 어도라고 하는데 좌우로 아홉 쌍의 품계석이 있다. 근정전을 기준, 동쪽에는 문관들을 서쪽에는 무관들을 배치했다.


원래 개국했을 때는 품계석이 없다가 1777년 정조 때 위계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만들었다. 혹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정조시대 이전을 다루는 장면이 근정전을 배경으로 나온다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기 바란다.


아래 사진을 확대해 보면 경복궁은 근정전을 중심으로 왕과 신하들이 생활하기 편리하도록 잘 만들어졌다. 1번이 광화문이고 2번이 근정전 앞이다.


< 도산서원 전교당 >


도산서원은 (陶山書院)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서원이다. 1574년, 퇴계 이황 (1501 ~ 1570)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도산 (島山) 안창호 선생님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해서 찾아보니 도산 (陶山) 서원에서의 도산은 지명일 뿐이다. 한글만 같을 뿐 한자가 틀리다.


서원 (書院)은 1543년 중종 때 만든 백운동 서원을 효시로 선비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가르침을 받고 글을 쓰고 배우던 일종의 교실이라 보면 된다. 정면에는 한석봉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려있다.

2012. 03. 08.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이다.


' 공자 79대·맹자 76대 종손 도산서원 창건 438년 만에 함께 퇴계에 禮를 올리다. '


이날 공자와 맹자의 후손이 도산서원을 찾아왔다. 전교당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행사가 열렸다.


유학 (儒學)은 중국의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전통적인 학문을 말한다. 공자와 맹자의 후손이 퇴계 이황의 신위 앞에 그를 존경하며 예를 표했다고 한다.


예전 1000원짜리 지폐를 기억하는가. 1975년 ~ 2007년까지 32년 동안 사용했던 구권 지폐의 앞면에는 퇴계 이황,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있었다. 이제 도산서원을 아주 쉽게 기억할 수 있겠다.


' 아 ~ 하 ~ 그 1000원짜리~~ '

< 남한산성 수어장대 >


수어장대 (守禦將臺), 산성과 수어장대라.. 뭔가 군사적이고 방어를 한다는 느낌이다. 지킬 : 수, 막을 : 어, 장수 : 장, 대 : 대(건축물), 한자 그대로를 풀이해보면 어떤 곳에서 장수가 지키고 막는다 라는 뜻이다.


수어장대는 말처럼 장군들이 성 밖을 관찰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이 축조되었을 때 여러 개가 지어졌는데 현재 1개가 남아있다.


시티뉴스 2009-02-27. 수어장대의 역사와 설화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광주 설화집 ‘너른고을 옛이야기’ (4편)에 실린 내용이다.


인조는 예부터 국난의 중요한 요새인 남한산성을 다시 튼튼히 만들고자 했다. 개축을 하면서 우선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해야 했다.


공조판서 이서에게 중임을 맡기고 북쪽은 벽암 대사에게 남쪽은 그가 신뢰하는 부하 이회에게 맡겼다.


공사가 시작되자 북쪽을 맡은 벽암 대사는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 착착 성을 쌓았다. 하지만 이회가 맡은 남쪽 지역은 공사기일이 북쪽에 비해 더뎠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북쪽은 승려들이 맡았기 때문인지 각종 물자와 식량 등이 잘 조달되었지만 남쪽의 일반 백성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허기와 추위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남쪽은 산세가 험학해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많았으니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 공사를 해야 했다.


조정의 신하들은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남쪽이 너무 느리다며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총책임자인 이서는 인조에게 불려 가 질책을 받았다.


이서는 이회를 불러 수어장대 앞에 무릎을 꿇리고  이유를 물었다. 이회는 있는 그대로 남쪽 성곽의 상황을 설명했으나 이서는 이를 변명이라고 여겨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중략) 이하는 내용이 길고 장문이므로 생략한다. 이 글 맨 아래 링크를 걸어뒀다.


수어장대 앞에서 참수된 이회가 맡은 남쪽 지역은 비록 여건이 좋지 않았고 공사 기간이 좀 더 길었지만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꼼꼼히 쌓은 결과, 승려들이 공사한 북쪽 지역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지만 남쪽 지역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마무리 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리 문화유산을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봤다. 시험문제를 떠나서 우리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도 결코 뒤지지 않는 우수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K- POP이나 드라마 등 뛰어난 문화 가치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선조들이 쌓아온 예술적 감각 덕분이다.


어쩌면 문화 DNA가 우리 몸속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점수를 얻기 위한 한국사가 아니라 전반적인 이해와 흐름을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다면 개개인의 삶이 풍요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 참고 자료 -

*국사편찬 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표준국어대사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f71bcbae0ca47d2b34677978bf2de5c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시티뉴스 기사
http://m.ctnews.co.kr/a.html?uid=9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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