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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작가 Jan 26. 2022

그랬군요. 고려 광종 때부터 개천에서 용이 나왔네요.

초급 17번. 한국사 기출문제, 시험을 통한 인재 선발의 효시. 과거제도

*다양한 주제의 한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셔요.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고급 관리의 자제가 시험도 없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음서제도 ) 고려 정계에는 과거제가 파격적인 제도였음은 맞다. 그만큼 기득권을 가진 계층은 불만과 반대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왕권이 약화된 시대에서 왕에게 힘을 실어주는 개혁을 외친 쌍기가 필요할 수밖에..

*잠시 생각을 해보자. 내가 부인이 29명을 두고 있었다면 최소한 부인 1명당 자식도 1명 이상이었을 거다. 수십 명의 아들들이 당연히 왕위 승계를 두고 큰 싸움을 할 여지가 있다.

*이른바 쌍기에게 총대를 매라고 시킨 것이 아닐까.. 개혁은 해야겠는데 누가 스스로에게 불이익을 주는 게 뻔한 과거제를 하자고 찬성을 하겠는가.

*과거제도가 일반 평민들에게도 '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  기회를 만들어준 거다. 이른바 신분상승의 도구가 되었던 셈이다.

*현대판 음서제, 고려나 조선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관료들이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적게 버는 사람과의 소득 불균형이 사회 문제가 된 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론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면 그만큼 돈을 많이 버는 건 당연한 거고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러나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 같은 불로소득과, 건물주가 어찌 보면 불편한 진실일 수 있겠지만 우리의 꿈인 게 현실이네요.

한편으론 계층 간의 사다리가 거의 끊어져가고 있지요.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인 지위에 따라 자식들은 입시 경쟁에서 벌써 저만큼 앞서 나가서 달리고 있죠. 부모가 맞벌이를 하면서 부지런히 교육에 힘을 써도 버겁습니다.

사법고시 제도가 로스쿨로 바뀐 이후 좀 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시험을 보기 유리하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최초로 과거제도를 실시한 광종처럼 입시나, 취업을 위한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하지요. 그러나 현실은 혼란스럽고 느리게 조금씩 바뀌고 있죠.

그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귀족사회인 기득권층의 반대로 과거제도의 시행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겠죠.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 (              )의 실시 -

짐은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기로 결정하였노라.
제술과와 명경과 등으로 나누어 실시하니 능력에 따라 선택하여 볼 수 있기를 바란다.
            
                                            * 광종  / 인 *      
            
1. 골품제 2. 과거제 3. 양천제 4. 음서제

-  과거제 -

고려시대 광종의 (인)이 찍힌 방이 저자 거리에 붙었다. 왕이 필요한 인재를 시험을 통해 뽑으려 하니 능력에 맞게끔 지원하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제를 실시한다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에 관리로 나가는 방법은 포괄적으로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시험을 치르거나 특별 채용을 하거나.

신분제도가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공평하게 시험을 볼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고급 관리의 자제가 시험도 없이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음서제도 ) 고려 정계에는 과거제가 파격적인 제도였음은 맞다. 그만큼 기득권을 가진 계층은 불만과 반대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광종은 ' 쌍기 ' 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분은 누구인가 알아보자. 쌍기는 중국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으나 귀화를 한 인물이다.

광종은 중국 태생인 쌍기에게 높은 관직을 주면서 까지 그를 총애했는데 다 이유가 있다. 왕권이 약화된 시대에서 왕에게 힘을 실어주는 개혁을 외친 쌍기가 필요할 수밖에..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정책을 썼다. 29명의 부인을 둔 정략결혼이었다. 이 정책은 여러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자. 내가 부인이 29명을 두고 있었다면 최소한 부인 1명당 자식도 1명 이상이었을 거다. 수십 명의 아들들이 당연히 왕위 승계를 두고 큰 싸움을 할 여지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조선시대는 왕의 아들, 손자가 다음 왕권을 이어받은 것과 달리 고려는 형제간에 왕위 계승이 많았던 것에 이유가 된다. 고려의 초기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조 (왕건) > 혜종 (왕건의 맏아들) > 정종 (왕건의 아들, 혜종의 이복동생) > 광종 (왕건의 아들, 정종의 동생)..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왕건의 사후 혜종은 이복동생들과 왕위를 둘러싸고 심한 다툼을 했고 나라 꼴은 점점 말도 안 되게 혼란스러워져 갔다.

네 번째 왕위를 이은 광종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호족(왕족이 포함된)의 힘을 누르고 왕권강화를 해야만 했다. 이과정에서 귀족의 반대와 견제를 무릅쓰고 ' 쌍기 '를 등용해 과거제도를 실시한 거다.

이른바 쌍기에게 총대를 매라고 시킨 것이 아닐까.. 개혁은 해야겠는데 누가 스스로에게 불이익을 주는 게 뻔한 과거제를 하자고 찬성을 하겠는가. 귀족들은 음서제, 힘 하나 안 들이고 관직을 세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과제제를 실시했다고 해서 음서제가 없어진 건 아니다. 조선 시대까지 두 제도가 병행되었다. 우리 역사상 과거제도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광종이 호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실시한 과거제를 통해 등용된 유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고려 말기 신진 사대부가 되고 결국 조선을 건국하는 주된 세력을 이룬다.


호족들은 당연히 과거제도에 불만이 많았지만 광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으로 나가는 이들의 수를 점점 늘려갔다.

이화여대의 한영우 석좌교수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과거제도를 분석한 결과가 흥미롭다. 5백 년 동안 약 1만 4천 여명의 과거 급제자를 분석했는데 10명 중 4명은 평민, 중인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광종의 왕권강화의 일원으로 처음 실시한 과거제도는 갑오개혁 (1894) 때까지 900여 년을 이어왔다.

한영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흔히 주로 양반들이 출세의 등용문이라 여겼던 과거제도가 일반 평민들에게도 '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  기회를 만들어준 거다. 이른바 신분상승의 도구가 되었던 셈이다.

-  음서제 -

음서제는 다른 말로 공음(功蔭) 또는 문음(門蔭)이라 하기도 했다.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고위 관료의 자식들에게 관직을 세습하는 게 음서제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기만 하면 인성이니 실력은 따지지 않고 출세 길이 열렸다.

잊을 만하면 뉴스에 ' 현대판 음서제 ' 라 여기는 고위 관리직 자녀의 채용비리 사건이 종종 보도되곤 한다. 고려나 조선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일부 관료들이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 양천제 -

처음엔 용어가 조금 생소했다. 양천제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양인 / 천민을 줄인 거다.

조선사회는 양인과 천인을 나누도록 법으로 만들었다. 양인, 중인, 상인, 천민 4 계층으로 세분화됐다. 천인은 자유가 없고 원칙적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다.

서구 사회에서 노예제도가 있었듯이 천인도 똑같이 재산으로 취급받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조차 갖지 못했다.

오늘날, 그 정도의 신분 차별은 없지만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 이후로 계층 간의 불평등은 앞으로도 인류 문명의 숙제다.

- 골품제 -

신라의 신분제도로 성골, 진골, 6두품으로 나눠 각 계급마다 차별을 두었다. 쉽게 말하면 성골은 왕족 중에 왕이 될 수 있는 신분이고 진골은 왕족이지만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한 태종 무열왕 (김춘추) 이후 진골도 왕이 될 수 있었다.

『삼국사기』권 33, 「잡지」 2 옥사에 기록에 따르면 골품에 따라 사는 방의 길이와 넓이, 진골 >> 24자, 6두품 >> 21자, 5두품 >> 18자, 4두품~백성 >> 15자를 넘지 못지 못하도록 규정했다고 한다. 1자는 1척과 같은 단위로 약 30cm 정도 다.

<마무리 글>


기득권의 힘을 누르고 새로운 개혁을 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희생이 따른다. 과거제도와 노비 안검 법 시행은 대표적인 고려 광종의 업적이다.

과거제도는 세습으로 내려오던 관직을 여러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귀족 세력의 힘을 뺐다.

노비 안검 법 역시 원래 노비가 아닌 자들의 신분 회복을 시켜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귀족의 사병을 줄였다.

강럭한 왕권 강화로 인해 폭군이라 불리기도 했던 광종, 역사는 역시 비슷하게 반복된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 )이 기반을 잘 닦아준 덕분에 세종이 조선을 문화혁명의 꽃을 이루었듯이 광종 > 경종 > 성종 때에 이르러 고려의 중앙집권적 국가 운영체계의 기틀이 마련된다. 


-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뉴스 워치 기사
http://www.newswatch.kr/news/articleView.html?idxno=5116

*우리 역사 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3_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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