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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고려시대의 별무반 하면 윤관 장군이 떠오른다. 어째 이런일이, 윤관과 심지원의 묘자리가 겹치다니.파평 윤 씨 가문과 청송 심 씨 가문의 산송 분쟁 (묘자리를 두고 일어나는 다툼)이 3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별무반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기병을 보강해서 만든 일종의 특수부대다.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소탕한 후 동북 9성을 쌓았으나 관리에 한계가 있어서 결국 다시 그들에게 돌려줬다.
*고려의 장군 윤관, 강감찬 하면 칼날을 휘두르며 적을 제압하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이들은 과거급제를 한 문과 출신들이다. 무신정권 이전에는 병법에 능한 문관들이 전투를 총지휘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지금도 각종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별무반 하면 떠오르는 건 윤관 장군입니다. 이분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산송(山訟) 분쟁이란 묘를 쓰는 과정에서 일어난 법적 다툼을 말합니다. 윤관은 1111년에 사망, 심지원은 정승을 지낸 인물로 1662년 사망했지요.
그가 죽자 심지원 가문에서 묘를 썼는데 공교롭게도 고려의 윤관 장군 묘 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심 씨 일가의 가족 묘가 근처에 조성되었고요.
당연히 일부러 그렇게 할리가 없겠지요. 선조들은 묘자리를 볼 때 명당을 찾아 묘를 썼는데 윤관의 묘가 버려져 있다가 나중에 발견되면서 파평 윤 씨와 청송 심 씨 가문의 후손들이 분쟁을 하게 된 겁니다.
조선이 망하고 2007년까지 해결되지 않다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중재로 심 씨 가문의 묘 19기를 인근 대체 부지로 이장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두 분들은 말이 없으시죠.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산송 분쟁이 정리가 되어 다행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대답으로 옳은 것은?
고려시대 별무반에 대해 말해볼까요?
1. 대마도를 정벌했어요. 2. 조총을 다루는 부대도 있었어요. 3. 배종손을 중심으로 몽골에 저항했어요. 4. 윤관의 건의로 조직되었어요.
별무반(別武班)은 학창 시절 시험에 나와서인지 익숙한 단어다. 나눌 : 별, 병사 : 무,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군 조직을 나눈 체계를 말한다. 정규군 이외에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든 일종의 특수부대라 하겠다.
어떻게 나눴는지 궁금 하지만 우선 고려 숙종 때 별무반이 만들어진 이유가 뭔지부터 알아보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첫 번째 -
여진족은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던 말갈족이 여진이 되어 고려와 크고 작은 마찰을 빚었고 후금을 세워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또한 청나라로 중국을 통일해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대한 각종 이권을 두고 여러 나라와 각축을 벌였다.
장황한 설명 같아서 간단히 그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말갈족 (발해)> 여진족 (고려)> 후금 (조선) > 청나라(대한제국) 이렇게 뿌리는 같지만 나라가 바뀐 거다.
이중 두 번째 여진족과 고려와의 관계가 이글의 포인트다.
발해의 멸망 이후 여진은 고려와 거란을 ' 부모의 나라 ' 라 부르며 섬겼다. 그러나 여진이 점점 고려로 들어와 세력을 넓히고 위협적으로 커나가자 고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 (1104년)은 임관과 윤관을 보내 이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들은 2번의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왔다.
잠시 고려사의 기록을 보자. 고려사 > 권 12 > 세가 권제 12 >1104년 3월 31일(양)이다.
윤관이 여진과 전투를 벌이다
정축 윤관(尹瓘)이 여진(女眞)과 싸워 30여 명의 머리를 베었는데, 우리 군대의 사상자(死傷)와 실종자도 과반이 넘었다.
여진과 고려와의 한판 승부에서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 모양이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배의 원인을 말한다.
" 우리 쪽은 보병이 주축인데 반하여 여진은 말을 앞세운 기병이 밀고 들어와 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하루빨리 새로운 군사편제를 다시 만들어 여진을 쳐야 합니다. ''
윤관의 설득력 있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고려사 12월의 기록이다.
〈숙종(肅宗)〉 9년(1104) 12월에 윤관(尹瓘)이 아뢰어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였다.
- 두 번째 -
여진과의 전투를 위해 특별히 만든 부대가 별기군이라 하지만 숙종은 일석이조였다. 밖으로는 오랑캐를 몰아냈고 안으론 잘 훈련된 군사들을 친위병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별기군의 구성을 살펴보자. 크게 나누면 신기군, 신보군. 항마 군으로 편성됐다.
신기군(神騎軍)은 기병이었다. 말을 가진 사람들을 모은 거다. 별기군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신보군(神步軍)은 그야말로 걸어서 이동, 백병전을 담당했다.
항마군(降魔軍)은 승려들로만 구성됐다. 불교에서 항마란 ' 악마를 항복시킨다 '라는 뜻이다. 남다른 불심으로 무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으리라 생각된다.
3개의 별무반 이외에 사궁 군, 도탕군 등 9개가 더 있었다. 총병력이 17만 명 정도였고 병사들은 군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지배층 포함, 양인들까지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만든 부대라고 한다. 숙종 (1104년) 때 별기군을 창설하고 강한 군대로 훈련시켜 그다음 왕인 예종 (1107년) 때 여진을 정벌했다.
윤관은 이들을 이끌고 함경도로 진군, 북쪽으로 여진을 몰아 내쫓았고 동북 9성을 쌓았다. 그러나 별기군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여진 정벌에 성공을 한 것 같으나 막상 성을 쌓고 관리를 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