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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 고려의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와 관련된 최무선(국내 최초의 화약 발명 )과 이성계의 일화가 있다.
*아라비아인들은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으니 나침반을 알게 된 그들이 먼 거리에서도 바다의 실크로드를 개척해 고려와 무역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려 말까지 왕성한 교류를 했던 국제 무역을 조선시대에 왜 중단시켰는지 의문이다. 혹시 이슬람교의 ' 평등 ' 과 연관되지 않았을까...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고려의 벽란도는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해상로를 통해 많은 물품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진 국제 무역항이었습니다.
벽란도는 최무선과 이성계와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지요. 우리나라 무기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쓴 최무선은 화약을 국산화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이곳 벽란도에서 그는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달려가 화약 제조법을 묻고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중국에서 들어오는 화약을 불꽃놀이에만 썼지 무기로 활용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지요. 마침내 최무선은 화약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터득했고 왜구 토벌에 이용, 상당한 성과를 이뤄 냈습니다.
벽란도의 상인들이 없었다면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이뤄지지 못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왜구가 있는 배에 쏘자 놀라서 달려 나오는 왜구들을 이성계와 여러 장수들이 섬멸시켰다고 합니다.
고려말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후 벽란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답니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 여긴 정몽주 일파는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자 아들 이방원이 한밤중에 벽란도로 가서 아버지를 개경으로 모셔 왔지요.
벽란도는 무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함께 하고 있었네요.
송 : 이보게 ~ 김 씨. 잘 지냈는가? 지난번 주문한 인삼은 준비됐지?
고려 : 오~ 형님, 어서 오세요. 물론이지요.
최상급으로 가져다 놓았습죠. 근데 같이 오신 분은?
송 : 아, 이 사람 말이지.. 자네한테 소개해주려 데려왔지. 큰 배를 타고 멀리서 온 친구여..
아라비아 : '앗-쌀람 알라이쿰' (아랍식 인사) 반갑습니다. 아라비아에서 수은과 향료를 가지고 왔어요.
고려시대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에서 각국의 상인들이 서로 만나 나누었을 듯한
대화다.
육로를 통해 중국까지 실크로드를 개척한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나라 장사꾼들에게 여기서 조금만 배를 타고 가면 벽란도라는 시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라비아 상인은 아프리카 북부, 유럽, 아시아에 걸쳐 무역을 하던 서아시아 상인들을 통틀어 말한다.
육로를 개척한데 이어 바다의 실크로드까지 항로를 만들어 고려의 벽란도까지 들어와 무역을 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인류 문명의 대변화를 가져왔다.
이중 나침반은 항해술 발달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나라 사람인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쓴 책 ' 고려 도감 ' 에서 바닷길을 통해 고려로 갈 때 나침반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책에는 송의 사신들이 탄 배가 흑산도에 도착해서 개경까지 갈 때까지 봉화를 피워 안내했다는 걸로 보아 해안가의 봉수가 오늘날 등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라비아인들은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으니 나침반을 알게 된 그들이 먼 거리에서도 바다의 실크로드를 개척해 고려와 무역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나라의 Korea 란 국제 공인 국가 이름이 알려졌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Core > Corea > Korea로 바뀐 거다.
벽란도(碧瀾渡)를 한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 푸른 물결을 건너다 '라는 뜻이다.
나루는 강 또는 좁은 바닷 목에서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말하는데 보통 큰 나루를 도(渡), 진(津)이라 한다. 도와 진으로 붙여진 익숙한 지명들이 많이 있다.
양화도 (양화대교 자리), 삼전도 (서울 송파구), 노량진, 광진, 당진, 신탄진 등이 큰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있었다. 외국의 큰 선박들이 오가며 무역을 했던 곳이다. 처음엔 예성항이라 불렸다가 중국 사신이 머물다가는 숙소인 벽란정의 이름을 따 ' 벽란도 ' 라 불렀다.
잠시 아래의 구글 지도를 살펴보자.
예성강은 강화도와 지척이다. 현재 개성공단이 있는 지역은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예성강 하구는 바다와 인접해 물이 깊어 배가 드나들기 편했다.
벽란도에서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던 주요 수출품은 인삼, 삼베, 모시, 종이, 목 등을 수입품은 비단, 각종 약재, 차, 책들이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의약품이나 향신료 등을 팔고 우리는 청자나 비단 등을 거래했다.
고려사를 보면 그들은 고려 왕들을 섬긴 흔적이 있다. 현종과 정종 때 ' 대식국 사람들이 방물을 바치다 '라는 기록이 있다. 대식국은 이슬람 상인들을 말한다.
1. 군산진 : 조선시대에 만든 군사시설로 해상 방어와 경제적 조운(漕運) 역할을 했다.
2. 당항진 : 신라 진흥왕 때 백제의 한강 유역을 점령 후 서해에 설치한 무역항.
3. 제물포 : 인천항을 말한다. 근대 우리 역사에서 1883년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된 곳이다.
<마무리 글>
벽란도를 살펴보면서 아쉬움이 남는다.
외국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했던 벽란도는 고려의 멸망 이후 활기를 잃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국가적으로 국제 무역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여러 나라와의 교역이 계속 활발히 이어졌더라면 일본보다 한발 더 앞서 서구에서 개발된 총의 위력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조총을 우리가 먼저 들여와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지 않았을까 말이다.
고려 말까지 왕성한 교류를 했던 국제 무역을 조선시대에 왜 중단시켰는지 의문이다.
아라비아 상인을 이슬람 상인 이라고도 한다. 이슬람의 사상은 ' 하느님 앞에 평등 '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신분 체계는 평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다. 그들과의 교류가 더 많아질수록 이슬람교가 들어와 조선 사회에 널리 퍼졌더라면 조선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