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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Mar 09. 2022

행복 / 유치환

시 해설  /  임세규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고

헝클어진 인정의 꽃 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시 해설 ] / 임세규

깃발과 더불어 유치환 시인의 행복은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시죠. 깃발이 힘찬 남성적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면 행복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유치환 님이 시인 이영도를 만나 애틋한 감정을 담아 쓴 시입니다. 실제 모델이 있는 시구요. 엄밀히 말하자면 불륜이라 할 수 있어요.

1947 ~ 1967년까지 20년 동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편지를 썼는데 6.25 전쟁 이후에 남아 있는 것만 5000여 통이라고 합니다.

노골적인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부인 권재순 여사는 속이 많이 탔을 듯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내가 유치환 시인이 현대사에 남을 만큼 뛰어난 시들을 창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시를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일이 있었네요. 아련한 사랑을 한건 아니구요. 중학교 때 저희 집엔 다락방이 있었어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거기서 듣는 라디오의 노래들이 어찌나 좋던지요. 혹시 라디오 DJ 이종환 님을 아실까 모르겠네요. 아마 40.50세대는 아실 거예요.

어느 날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에서 클래식 기타 연주를 배경으로 행복이 낭독되었습니다. 순간 먹먹한 감정이 들더니 지금까지도 제 마음에 잔잔한 여운이 남게 만들었네요. 클래식 기타를 오랜 시간 동안 취미로 연주해 온 것도 이때부터죠.

자, 이제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이나 제가 가진 추억을 뒤로하고 있는 그대로 순수한 사랑에 대한 관점으로 볼까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머릿속에 이 상황이 그려집니다.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씁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보내며 느낀 행복은 감정이입이 되어 전해 옵니다.

< 헝클어진 인정의 꽃 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헝클어진 인정의 꽃 밭이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화자의 복잡한 심경이 아닐까요. 양귀비의 꽃말은 꽃색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주홍색 : 약한 사랑, 덧없는 사랑
자주색 : 허영, 사치, 환상
붉은색 : 위로, 위안, 몽상
흰색 : 잠, 망각

시인은 이영도에 대한 사랑을 애틋하고 그리운 진한 빨간빛의 양귀비꽃에 담았습니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은 플라토닉 사랑에 대한 절정을 보여줍니다. 원래 사랑은 서로 주고받아야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요..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진정 행복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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