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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Sep 12. 2022

왕을 빛낸 최고의 어시스트 8인 /임세규

조선의 킹메이커 / Book review


조선의 킹메이커 / 박기현


왕을 빛낸 최고의 어시스트 8인 /임세규


 -  글 시작에 앞서서 -


사람 인 (人 ) 자는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상이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바탕으로 조화롭게 살아간다.


인류 역사에서 어떤 분야에 뛰어난 성과를 낸 인물 뒤에는 반드시 그를 도운 사람이 있다. 굳이 멀리 찾아볼 필요 없이 손흥민은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의 축구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손흥민 아버지 손웅정은 아들의 재능을 이끌어 내기 위해 독특한 훈련 방법으로 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렇듯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건 어시스트가 있었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왕의 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도록 도운 정치가들이 있다.

' 조선의 킹메이커 ' 는 왕과 함께 조선을 번영시킨 참모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군주를 위해 그들이 조력자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킹메이커를 통해 작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리더로서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논하기도 한다.


이들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린 참모가 있는 반면 서러운 유배 생활, 왕에게 버림받는 등 비참한 죽음도 맞이 한다.

하나의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도전과 개혁 앞에 놓인 수많은 난관을 나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의 입장에 서서 감정이입이 되어 보기도 한다.

이 책에서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8인의 킹메이커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처세를 배우고  철학을 배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 중심으로 킹과 메이커를 만나본다.

첫 번째 킹과 메이커, 이성계와 정도전

[ 체계적인 시스템의 개혁으로 태조의 창업을 도운 리더십 ]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이성계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치적 명분과 대중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역성혁명의 정당화를 위해선 강력한 정치적 시스템이 필요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제도적 정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인재 채용을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제도가 과전법 실시다. 정도전은 '과도한 세금 부여를 줄이고 효율적인 국가 재정은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하는지 ' 에 대한 고민을 했다. 바로 이 고민의 결과가 과전법이다.

과전법은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한다는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관리와 백성들에게 다시 재분배해주는 시스템이다.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과도한 농장과 토지 소유는 국가 재정뿐 아니라 백성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공민왕 때 실시한 전민 변정 도감 ( 권문세가들이 빼앗은 토지와 농민들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임시 개혁 기구)은 너무 과격한 추진으로 귀족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개국 직전인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과전법은 합리적인 토지 정책이었다.


과전법으로 귀족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다. 이 제도는 국가 재정의 안정을 가져왔다. 백성들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과전법은 조선 경제 개혁의 핵심으로 나라의 틀을 잡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힘과 권력을 이용해 밀어붙이는 개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기득권을 가진 권력층이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제도를 먼저 바꾸어 경쟁상대들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의 혁명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두 번째 킹과 메이커, 태종 이방원과 하륜

[태종의 결단과 판단력을 이끌어 준 리더십]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 한다는 의미로  마음이 잘 맞는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반대로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먼저 알아채고 서로 함께 한다면 부부생활은 행복하게 유지된다.

제아무리 학문과 지식이 많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군주의 생각을 먼저 읽어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참모가 필요하다.


태종 이방원은 골육상잔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종은 사병혁파, 의정부 설치, 호패법, 신문고 제도 등등 조선 초기 통치의 기반을 다진 왕이라 평가받는다. 이러한 정책들 뒤에는 바로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하륜의 성품은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며 말수가 적어 매사에 차분했다고 한다. 또한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하는 결단력도 있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요구한다. A와 B 중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할 때 주저하며 망설이게 된다. 이때 누군가가 용기를 북돋아주고 올바른 길을 알려준다면 그에 대한 신뢰감은 확고해질 거다.

하륜이 그랬다. 그는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에서 주저하는 이방원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숙번으로 하여금 300명의 군사를 비밀리에 준비시켰다. 마침내 거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정권을 잡은후 그는

형인 이방과가 먼저 세자 자리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피로 얼룩진 왕권 다툼의 완충제 역할을 하도록 기획했다.

위기의 순간 빠른 결단력이 필요할 때, 자칫 오만해질 수 있는 왕의 섣부른 판단력 뒤에는 하륜이 있어서 왕의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가 있었기에 태종은 강력한 왕권 강화를 이루었다. 하륜의 도움을 받은 태종이 튼튼한 기반을 마련 해주었으므로 세종이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킹과 메이커, 세종과 황희

[정책과 인재 등용, 설득과 협력의 커뮤니케이션을 보완한 리더십]

국가의 새로운 법이나 정책을 너무 서두르면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성급하게 시행된 정책은 취지나 목적은 옳지만 오히려 국민의 살림살이를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국가의 제도나 정책은 느림과 빠름의 균형을 잡는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세종이 우리 역사의 전무후무한 왕으로 남은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열정과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과의 괴리는 그가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할 때마다 늘 따라다녔다. 이럴 때 황희는 세종과 신하들의 중간에 서서 조율하며  완급 조절을 했다. 또한 나라의 중대사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중재를 하며 세종의 리더십을 보완했다.

인재 등용에도 세종과 호흡이 맞았다. 집안의 뒷 배경보다는 실력을 우선시 한 인사정책을 실시했다. 그중 장영실을 등용한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봉건 신분제도의 사회에서 노비가 벼슬을 하며 관직에 오른다는 건 사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신료들은 왕명을 거두어 달라며 반대를 했다. 황희는 장영실의 기용에 큰 역할을 했다.


황희는 세종이 생각한 조세 제도의 개혁을 현실화하기도 했다. ' 손실 담험법 '을 실시했다. 이는 관리가 탁상 행정으로 세금을 메기는 것이 아니었다. 이 법은 직접 농지로 나아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파악해서  관리가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다. 지금도 현장을 우선하지 않는 탁상행정의 폐해가 종종 일어난다. 세종이 생각하고 황희가 실시했다 하니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이 놀랍다.

새로움은 늘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왕이라고 해서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할 수는 없다. 설득과 협력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군주의 생각을 잘 읽고 신하들이 잘 보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황희가 없었다면 세종의 업적은 빛을 발휘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네 번째 킹과 메이커, 세조와 신숙주

[정치적 이해타산보다 조선을 위한 열정으로 이끈 리더십]

녹두에서 온 숙주나물은 쉽게 변하는 특성이 있다. 이 나물의 유래는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가담한 신숙주의 절개에 빗대어 지은 나물 이름이라 한다.

신숙주는 사실 유능한 신하였다. 세종은 일찍이 그를 알아봤다. 집현전 학사의 최고 으뜸인 직제학을 맡겼다. 집현전은 세종의 싱크탱크였던 만큼 당대 뛰어난 천재들만 모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는 신숙주가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서 잠이 들었다. 세종이 자신의 곤룡포를 덮어 주었다고 한다. 세종의 신뢰가 그만큼 두터웠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해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다. 무려 8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능력이 출중한 신숙주를 지켜보고 있었던 수양대군은 그를 자신의 참모로 삼기 위해 눈여겨 두고 있었다. 마침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수양 대군은 신숙주와 함께 4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 했다. 이때 신숙주는 머나먼 여행길에서 수양대군의 배짱과 포부, 포용력 등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았다.

수양대군을 따른 신숙주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결과다. 어찌 되었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찬탈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계유정난에 가담했던 이유로 배신자라 낙인이 찍였지만 신숙주는 인간적인 고민을 분명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을 선택했던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신숙주는 세조 이후 성종까지 무려 6명의 군주를 모시고 국가 정책에 기여를 했다.
왜 그는 역대 왕들에게 신임을 받았을까..

세조는 신숙주의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알고 있었다. 중국과 외교에서 13번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그를 신뢰했다. 그나마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명분을 일부라도 정당화할 수 있는 데는 신숙주의 역할이 컸다.

신숙주는 정치적 이해타산이나 자기 이익을 위한 권력에 깊은 관여를 하지 않았다. 학문을 기반으로 왕에 대한 조언, 문화, 외교 등 국정 운영 능력이 뛰어났다. 세조가 신숙주를 자기 사람으로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정권을 잡기 위한 참모로 한명회가 있었다면 통치자로서의 왕을 만들어준 참모는 신숙주다.


다섯 번째 킹과 메이커, 중종과 조광조


[ 경연을 통한 교육으로 군주의 자질을 만들어 낸 리더십 ]


중종반정 (中宗反正)이란 말 그대로 '  바름으로 돌아오다 '라는 뜻이다. 연산군의 폭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신하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연산군 재위 12년은 그야말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두 번의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 재정 또한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온갖 폭정을 견디다 못해 훈구파를 중심으로 중종반정이 이뤄졌다.


중종은 진성대군 시절, 연산군의 견제로 늘 노심초사한 나날을 보냈다. 중종반정 이후 떠밀려서 왕위에 오른 그는 힘이 없었다. 기세 등등한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하늘이 주신 참모가 과거시험을  통해 중종의 눈앞에 나타났다. 조광조의 혜성 같은 등장이었다. 임금의 마음을 알아주고 훈구파를 견제해 줄 신하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광조는 그야말로 딱 맞는 적임자였다.


중종은 경연에 적극 참여하며 조광조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조강, 주강, 석강뿐만 아니라 늦은 밤까지도 토론과 공부를 했다. 모자란 군주로서의 자질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경연은 학문을 논하고 신하와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정 현안을 왕과 활발한 대화를 하며 논의하기도 했다.


중종의 의지는 대단했다. 조광조는 군주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끌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간파했다. 그는 중종의 교육에 두 팔을 걷고 힘썼다.


반정 공신 세력을 누를 힘이 필요했던 중종은 사림파를 대거 등용시켰다. 조광조는 그들 뒤에서 사림의 지원 아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지나치게 과격한 면이 있었다. 너무 성급했다. 또한 사림파들은 도가 넘는 상소를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위훈삭제란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76명의 공신들을  명단에서 삭제한 사건이다. 훈구파는 이에 격분했다. 그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 주초위왕 '이라는 일화가 나온다. 주와 초자를 합치면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들이 글씨대로 파먹게 만들었다.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걸 중종이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한다. 중종은 너무 앞서간 조광조를 축출하기 위해 명분이 필요했다. 마침 훈구파가 조광조를 역모의 프레임에 걸었다. 중종은 이때다 싶어 반정공신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중종과 조광조 두 분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신하들에 의해 떠밀며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자신이 군주로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조광조를 만나 자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의심 많고 유약한 성격 때문에 조광조를 믿지 않고 결국 사약을 내린다.


조광조 또한 중종의 속마음을 너무 몰랐다. 중종이 원한 건 조광조를 통해 훈구파를 건제하기 위함이었다. 조광조의 무리한 개혁과 군주에 대한 압박으로 왕은 더 이상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사실 과격한 개혁이기는 했지만 중종은 조광조를 믿고 조선을 이끌었어야 했다. 훈구세력이 정권을 다시 잡은 후에 나라의 정치와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조선은 더욱 어렵게 됐다.


조선의 개혁을 5년 동안 이끌었던 조광조는 떠밀려 왕이 되어 아무 힘이 없는 중종을 진정한 군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참모였다. 하지만  왕은 그를 배신했다. 중종은 조광조 사후 25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여섯 번째 킹과 메이커, 선조와 유성

[ 못나도 한참 못난 임금을 관용으로 이끈 리더십 ]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선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이었다. 자신이 모자란다는 불안한 심리가 이상한 사고와 행동으로 나타났다.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선조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국가 전체로 보면 그로 인해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유성룡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기에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 그가 전쟁이 끝난 후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뜻에서 저술한 징비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징비록은 왜란 중 일어난 사건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쓴 일종의 전쟁 백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백성을 뒤로한 채 

도망가기에 바빴다. 오로지 자기 안위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 중국 땅으로 가려했으니 말이다.

선조 수정 실록 25년 5월 1일 자 내용이 인상적이다. 선조가 국경을 넘어가고자 유성룡에게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단호히 선조에게 말한다.

"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

선조와 일부 관료는 중국으로 넘어가면 일본이 명나라까지는 못 쫓아올 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유성룡은 인심이 와해될 거라 생각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싸움터로 전락하게 됨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는 '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병과 군사들도 있는데 어찌 한번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먼저 도망을 가는가 '라는 질책으로 선조와 조정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만일 이때 유성룡이 없었다면 우리 군사들은 기가 꺾여 일본이 손쉽게 조선을 차지할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중 보여준 유성룡의 리더십은 놀라웠다. 전쟁 상황에 알맞는 인재를 추천했다.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했다. 또한 훈련도감을 설치, 초반에 밀렸던 전쟁의 양상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이순신과 권율 장군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두 명의  전쟁영웅이 없었다면 조선은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이처럼 능력이 출중한 유성룡에게 열등감을 느낀 선조는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선조는 유성룡을 폄하하며 인사이동을 하려 하자 비변사의 반대에 부딪혔다.

예나 지금이나 공통점이 있다. 정치에서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 옆에는 반드시 모난 정적 (政敵)들이 있기 마련이다. 안으로는 유성룡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조정 관료들과 일본의 술책으로 그는 파직됐다. 선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삭탈관직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그에게 돌아온 대가가 파직이었다. 유성룡이 선조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지 짐작해본다. 하지만 어떠한 기록에도 유성룡이 선조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했다는 정황이 없다. 관직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안동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10년 후 생을 달리했다.

유성룡이 임금의 참모로서 대단한 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거다. 그는 변덕이 심하고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선조에게 때로는 강한 질책을 했다. 때로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살려주기도 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무리 못난 군주라 할지라도 임금의 권위를 넘어선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 관용이다. 유성룡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조차 몽니를 부린 임금을 지켰다. 그는 왕의 옆에서 참모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를 실천으로 보여줬다.


일곱 번째 킹과 메이커, 인조와 최명길

[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군주를 위해 지킨 지조의 리더십 ]

정묘호란은 인조 5년 (1627) 후금과 조선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전 조선은 인조반정으로 혼란스러웠다. 서인과 남인의 주도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내려왔다. 신하들의 힘에 의해 임금이 바뀌었다. 인조가 등극했다. 당연히 왕의 권력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명과 후금에 비해 조선의 국력이 부족 하다는 걸 광해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리추구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인조반정이후 조정은 ' 향명배금(向明排金)’ 즉 명나라를 위하고 금나라는 오랑캐라 여기며 배척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다는 이유로 가까이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으로 점점 세력이 커지는 후금을 배척한 건 인조와 관료들의 실수였다.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후금은 배후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조선을 먼저 쳐서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은 정묘호란 (1627)을 겪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치듯 쫓겨가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보다는 명나라와의 전쟁이 우선이었던 후금은 강화를 요청했고 인조는 수락했다.

9년 후 더욱 막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이라 바꾼 후 조선을 다시 공격했다.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회복되지 않았고 조정은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을 했다.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던 인조는 청군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갔다. 병사들은 1만도 채 되지 않았다. 성안의 식량사정도 좋지 않았다. 성 밖의 백성들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짓밟히는 상황이었는데 조정은 척화론 (결사항전)과 주화론 (청과의 협상)으로 나뉘어 논쟁만 벌이고 있었다.

척화 파는 오랑캐라 불리던 청나라에게 절
대로 굴복할 수 없으니 끝까지 항쟁하자는 김상헌을 중심으로 주장했다. 주화파는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은 화친을 하고 실리를 챙기자는 최명길이 주축이었다. 척화와 주화 어느 쪽이 조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화친을 내세운 최명길은 역적 취급을 받았다. 청군에게 포위된 성안의 상황은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악화일로로 달려갔다. 결국 인조는 최명길의 설득을 따라 청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끝까지 항전함이 옳은 건지 화친이 옳은 건지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주화론을 주장했던 최명길이 매국노가 아닌 군주와 나라를 위한 진정한 참 모였음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 생각한다.


임진왜란( 1592~1598)으로 국력이 크게 소진됐다. 군사력을 키우지 못한 채 조선은  정묘호란(1627)을 겪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 (1636)이 일어났다. 세 차례의 큰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일본과 후금에 의해 유린당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흐름도 급변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날이 갈수록 국력이 커졌다. 명나라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천왕의 시대가 아닌 힘 있는 자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나라가 되고 있었다.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고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있던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조선은 어떠했는가.. 당시 지식인들은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려 했다. 주변국이 변하는 흐름을 읽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명분과 청나라를 여전히 야만인과 오랑캐로 대하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최명길은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다. 앞선 두 번의 전쟁으로 백성들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고 있었다. 또다시 전쟁을 한다는 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약한 국력으로 명분을 앞세워 큰 나라를 상대해 싸운 들 희생만 커질 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인조가 삼배 고두례까지 하면서 청나라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러나 청군이 돌아가자 최명길은 국난 수습과 국력을  키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진정 그는 어떠한 비난속에도 왕과 나라를 위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최명길은 인조의 핵심 참모로서 목숨까지 위협을  받았다. 주화론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지조와 뚝심이 있는 그가 있었기에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여덟 번째 킹과 메이커, 정조와 채제공

[ 왕의 오른팔이 되어 함께한 동고동락의 리더십]

채제공은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이었다. 그는 영의정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은 노론이었고 그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관련 있었다.

정조는 즉위 후 수원화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화성을 기반으로 왕권강화를 하려 했다. 노론 세력은 축성을 견제하며 반대했다. 정조가 만일 화성천도를 하게 되면 노론의 정치적 힘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의 책임자로 채제공을 세우고 영의정으로 승진까지 시켰다. 노론과 적대관계인 남인의 대표 영수 채제공이 영의정에 올랐으니 조정 여론은 들끓었다.

그러나 채제공은 자칫 자신의 정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는 것이었다. 이때 정조는 노론으로 인해 당쟁의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금등문서를 공개함으로써 채제공을 보호했다.
정조는 당쟁으로 물든 나라를 어떻게든 안정을 시켜야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화성 축조와 채제공을 오른팔로 삼는 데 성공했다.

기세 등등한 노론을 꺾기 위해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거론했다. 정조는 영조가 남긴 금등문서를 공개해서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을 영의정에 올림으로 노론과 남인의 정치적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탕평이란 어느 한 세력에 치우치지 않고 각 당파에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말한다. 정조가 채제공을 국무총리와 같은 직책에 임명한 건 오늘날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일 대통령이 야당에서 국무총리를 임명하고 협치의 정치를 우선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조의 돈독한 신임을 받은 채제공은  조선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소외돼었던 남인들과 북학파와 함께 개혁을 추진했다.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이때 활약한 인물들이다.

채제공의 대표 정책으로 금난전권 폐지와 이조전랑의 폐지를 들 수 있다.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특권을 말한다. 독점체제의 문제점은 사대부들이 시전 상인들의 뒤를 봐주는 거다. 뇌물을 받는 등 부패의 온상이었다. 채제공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고 혁파를 했다.

이조전랑은 인사권을 가진 관직이었다. 삼사의 관리를 임명했다. 낮은 직책이었지만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도 있었다. 그 권한은 막강했다. 입김이 세다 보니 노론에게 유리한 인사들로 채우는 폐해가 나타났다. 채제공은 이조전랑을 폐지해버렸다. 정조도 마침 이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채제공의 요청을 수락했다.

이처럼 채제공과 함께 정조는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었다. 채제공의 개혁 정책으로 노론은 부의 축적과 인사에 대해 직격탄을 맞았다. 이 말은 그를 둘러싸고 온갖 시기와 견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했다.

채제공은 정조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이해했다. 정조는 채제공을 감싸 안으며 그를 보호해줬다. 리더와 참모 간의 관계에 있어서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개혁이란 기득권 세력의 공격을 받기 마련이다. 정조는 올바른 정치를 위해 기꺼이 채제공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다. 군주를 돕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상이 아닌 현실 정치에 최선을 다했던 채제공은 조선 최고의 참모였다.

8인 8색 킹메이커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왕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읽어내는 점이 탁월했다. 조선의 킹메이커를 읽으며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공감이란 단어를 생각해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한낮 필부보다도 못한 선조를 위해 충성의 리더십을 보여준 유성룡이었다. 열정이 넘치는 세종의 곁에서 완급을 조절했던 황희였다. 그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이성과 감정을 잘 다룰 줄 아는 공감능력을 배웠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신숙주에 대한 선입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 백성들에게 얼마나 원망을 샀으면 변절자라 낙인이 찍혀 숙주나물에 그 이름을 붙였을까만, 신숙주는 왕의 오명을 문화와 외교적인 성과로 덮은 훌륭한 참모였다.

정도전, 하륜, 황희, 신숙주, 조광조, 유성룡, 최명길, 채제공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바라본다. 조직에서 참모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리더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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