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플랫폼 그 끝에 서면..

by 임세규


"기차가 헤트 라이트를 밝히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이 설렌다."


서울 항동에 사계절을 즐길 수 있는 오래 된 철길이 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고즈넉한 겨울 철길을 걷는다. 산책이 주는 산뜻함이 좋다. 눈이라도 오면 누군가와 둘이서 함께 걷고 싶은 길이다. 딸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털장갑을 낀다. 따뜻하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큰집에서 설 명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어머니 손을 잡았다. 신호등 앞에 서자 눈으로 덮인 삽교역이 보였다.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를 기다렸다. 물끄러미 바라본 대합실 창문 너머에 기차선로가 있었다. 까치 한 마리가 기찻길 위에 잠시 앉았다가 '후두득 ' 날아갔다.

멀리 플랫폼 끝에서 제복을 입은 철도원이 빗자루를 들고 승강장에 있는 눈을 쓸어내렸다. 그와 기차역 주변 풍경이 참 잘 어울렸다. 점점 다가오며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 큰아버지였다.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강장 앞으로 갔다. 큰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알아봤다.

'' 오래간만이구나. 조그만 아기였을 때 봤는데 이렇게 컸어. ''

흐뭇해하는 큰 아버지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기차가 도착했다. 큰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기차에 올랐다. 창가에 앉자 큰 아버지가 보였다. 빨간 깃발을 들고 호루라기를 불어 기관사에게 신호 하자 기차가 출발했다. 회색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 10여 년이 흘렀다. 성인이 된 나는 입영 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그날 아침 부모님은 사정이 있어서 논산까지 함께 갈 수 없었다.

" 잘 다녀오겠습니다. " 미안해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마음이 불안했다.

저마다 스포츠머리를 한 청년들이 열차에 올랐다. 대부분 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였다. 혼자서 논산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 울적했다.

무심히 창밖을 봤다. '당분간 보지 못 할 서울 풍경이구나 ' 담담히 출발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제복을 입은 큰 아버지가 플랫폼에서 안내를 하고 계신 모습을 봤다. 서울로 올라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입영열차에서 큰 아버지를 보다니..

10시 44분. 기차가 출발했다. 큰 아버지는 논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떠나보내며 손을 흔드셨다. 마치 당신의 아들을 입영열차에 태워 보내는 듯했다. 사촌 형들은 나보다 먼저 군대를 다녀왔다. 큰아버지의 서글서글한 눈에서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심정이 보였다.

부모님이 같이와 주시지 못했지만 큰아버지가 대신 배웅을 해주시는 것 같아서 위로를 받았다. 파란 가을 하늘과 역무원의 제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세월이 20여 년 흘렀다. 나는 군대를 제대했고 직장 생활을 했다. 안산으로 출근을 하려면 금정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다.

바람이 '으스스' 옷깃을 스쳤다. 나는 문득 열차가 역사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플랫폼 끝쪽으로 걸었다.

어! 거짓말처럼 큰 아버지가 그곳에 계셨다. 큰아버지는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응시하면서
뭔가 생각에 잠기신 듯 보였다. 기차가 헤트 라이트를 밝히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나는 마음이 설렌다. 아마 큰아버지도 내 마음과 비슷했으리라.

인사를 드리자 큰아버지는 반갑게 맞아주셨다.
직장은 잘 다니는지 부모님은 잘 계신지 내게 안부를 물으셨다. 큰 아버지는 10년 전 정년 퇴임을 하셨다. 이른 아침에 어디를 가시는지 묻자 빌딩 관리원으로 계신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안산역으로 함께 갔다.

내가 입영 열차를 타고 갈 때 큰 아버지가 손을 흔들어 주셨다고 했다. 그는 어릴 적 나를 번쩍 들어주었을 때처럼 "그랬구나! 그랬어." 하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큰아버지가 할머니를 많이 닮으셨구나' 생각했다.

집안 행사나 명절 때 가끔 큰아버지를 뵈었지만 기차역에서 큰아버지를 세 번 만났다.

하얀 눈과 제복이 잘 어울렸던 청년, 한없이 사람 좋은 인상의 중년, 겨울 외투에 갈색 목도리가 잘 어울렸던 노년의 큰아버지를 만났다.

오래된 철로를 보면 아련한 마음이 든다. 봄이 오면 아내와 함께 항동 철길을 다시 걸어야겠다.

나는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 끝을 좋아한다.
그곳을 볼 때면 떠나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큰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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