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가장 비싼 공간을 낭비하고 있다
34평 아파트를 구매할 때 우리는 무엇에 돈을 지불하는가? 남향, 채광, 통풍, 조망권. 그리고 이 모든 프리미엄이 집중된 곳이 바로 거실이다. 정남향 중앙에 위치한 10~12평의 거실은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하며, 대형 창호를 통해 하루 종일 햇빛이 쏟아지는 이 집의 VIP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VIP석을 하루에 고작 3~4시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5평의 안방에서 8시간을 자고, 3평의 작은 방에서 아이들은 하루의 절반을 보낸다. 반면 가장 넓고 가장 밝은 거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텅 비어 있거나, 누군가 지나가는 복도 역할만 한다.
이것이 한국 아파트의 가장 큰 역설이다. 가장 가치 있는 공간의 활용도가 가장 낮다.
판상형 남향 아파트에서 거실은 건물 평면의 정중앙, 그것도 정남향에 배치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건축 설계의 기본 원칙은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중요한 공간을 배치하는 것"이다.
채광: 남향 대형 창호(5~6m)를 통해 동절기에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직사광선 유입
조망: 발코니 확장 시 탁 트인 전망 독점
통풍: 남북 관통 통풍의 핵심 경로
일조권: 법적으로 보호받는 최소 4시간의 일조량 확보
만약 거실의 이 입지를 부동산 가치로 환산한다면? 같은 34평이라도 "거실이 넓고 밝다"는 조건 하나로 매매가가 5~10% 상승한다. 평당 2,000만원이라면 거실 하나로 1억 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34평 쓰리베이 구조를 분석해보자.
거실: 10~12평 (35%)
안방: 5~6평 (18%)
건너방: 3.5~4평 (12%)
입구방: 3~3.5평 (10%)
주방: 3평 (9%)
화장실·현관 등: 5평 (16%)
거실은 안방의 2배, 작은 방의 3배가 넘는 면적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넓은 공간에 놓인 것은? 소파, TV, 커피테이블이 전부다. 10평이 넘는 공간에 실질적으로 활용되는 면적은 4~5평에 불과하다.
부동산 중개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다. "집은 거실에서 팔린다."
같은 평형이라도 거실이 넓고 밝으면 "이 집 좋다"는 첫인상을 받고, 거실이 어둡고 좁으면 "이 집은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실제 매물 사진에서도 거실 사진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배치된다. 거실은 집의 얼굴이자 가치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결론: 입지, 면적, 심리적 효과 모든 측면에서 거실은 아파트에서 평당 가치가 가장 높은 공간이다.
평범한 4인 가족의 하루를 추적해보자.
안방 (5평)
부부 수면: 밤 11시 ~ 아침 7시 (8시간)
옷 갈아입기, 화장 등: 30분
총 사용시간: 8.5시간
건너방/입구방 (각 3.5평)
자녀 수면: 밤 10시 ~ 아침 7시 (9시간)
방과 후 숙제 및 놀이: 2시간
총 사용시간: 11시간
거실 (11평)
아침 식사 및 준비: 30분
저녁 식사 후 TV 시청: 2시간
주말 가족 모임: 3시간 (주 2회)
평일 사용시간: 2.5시간
주말 평균 사용시간: 4시간
계산해보면 충격적이다. 거실은 평일 기준 하루의 10%만 사용된다. 나머지 90%의 시간 동안 그 좋은 채광과 넓은 공간은 그저 비어있다.
안방 5평 → 평당 하루 1.7시간 사용
작은 방 3.5평 → 평당 하루 3.1시간 사용
거실 11평 → 평당 하루 0.23시간 사용
평당 사용 효율로 따지면 거실은 방의 1/10 수준에 불과하다. 가장 비싼 공간이 가장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방-거실-방' 쓰리베이 구조는 1970~80년대 한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에 최적화되어 설계되었다.
핵가족 표준 모델: 부모 + 자녀 2명
성별 분리 원칙: 남아방/여아방 구분
접객 문화: 손님을 거실로 초대
TV 중심 여가: 온 가족이 안방극장 시청
하지만 2025년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1~2인 가구 비율 50% 초과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 일상화
개인화된 여가 (각자 스마트폰)
접객보다 개인 취미생활 공간 필요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50년 전의 평면도에서 살고 있다. 왜? "재판매할 때 3베이가 유리하니까", "원래 아파트가 이런 거니까."
관습이 합리성을 압도한 결과다.
거실(居室)이라는 한자어는 그저 '머무는 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어 'Living Room'의 의미는 다르다. '살아가는 공간', 즉 삶의 모든 활동이 일어나는 중심부다.
만약 거실을 진짜 Living Room으로 재구성한다면?
오전 8시 - 홈오피스
남향 창가에 이동식 책상을 배치한다. 형광등 불빛이 아닌 자연광 아래에서 일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업무 효율이 20% 이상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안방 구석의 작은 책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쾌적함이다.
오전 10시 - 홈트레이닝
요가 매트 하나면 거실은 최고급 헬스장이 된다. 11평의 넓은 공간에서 하는 필라테스, 남향 햇살을 받으며 하는 아침 스트레칭. 헬스장 월회비 10만원을 아끼면서도 더 좋은 환경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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