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점포 위에, 아이디어를 쌓는 사람들
AMD 사무실,
어느 날 오전
한기준이
신문을 들고 왔다.
"대표님 이 기사 좀 보세요"
[대전 최대규모 대형 상업시설,
장대동 페스타 포레몰
준공 후 1년 공실률 90% 육박]
[금융비 부담 눈덩이…
지역사회 골칫거리로]
김서준은 기사를 천천히 읽었다.
"전체 공실이 몇 평이지?"
한기준이 말했다.
"전체 2만 평 중
공실 90%,
1만 8천 평입니다."
김서준의 눈이 빛났다.
"장대동 시행사 대표와
바로 미팅 잡아줘"
***
사흘 뒤,
AMD 사무실
장대동 페스타 포레몰 시행사 대표가
AMD 김서준을 찾아왔다.
시행사 대표는
50대 중반의 사내였다.
'피곤한 눈빛.'
"수원 상가 사례를 봤습니다.
부산 서면, 대전 은행동 사례도 봤습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선택지가 없습니다.
연말까지 공실 해결이 안 되면
부도입니다."
"우리는 3,200억의
대출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자만 월 17억입니다.
3개월 더 가면
우리는 끝입니다."
김서준이 물었다.
"분양에서 임대로
전환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공실이 메워지면,
그때는 은행도
다시 설득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김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유성5일장은
100년 된 전통시장입니다."
"그 시장과 경쟁이 아니라
공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행사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전통시장과... 공생이라니,
어떻게 말입니까?"
"유성5일장을 중심에 두고,
페스타 포레몰로 동선을 이어서
하나의 생활권으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전통시장 상인들도 살고,
몰도 살고,
지역도 사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동선 연결이 가능한지...
현장을 같이 가보시죠"
***
같은 날 오후, 장대동
시행사 대표와 김서준,
한기준은 유성5일장에 섰다.
매월 4일, 9일.
100년이 넘은 전통시장
대전 '유성 5일장'.
포장마차에 불이 켜졌고,
할머니들이 좌판을 펼쳤다.
배추, 무, 고추, 마늘.
손때 묻은 저울이 놓였다.
바늘이 떨렸다.
플라스틱 대야에
손질 기다리는 생선이
겹겹이 포개졌고,
냄새가 올라왔다.
된장, 고추장, 젓갈, 생선.
할머니의 손이
배추를 쌓았다.
천천히,
같은 속도로.
손은 주름졌지만
움직임은 정확했다.
국밥 그릇에서
김이 올랐다.
숟가락이 그릇을 두드렸고,
발이 땅을 구르고,
웃음소리가 섞였다.
100년이 넘게,
같은 시간에,
같은 손으로.
천변에서 걸어서 5분.
49층 주상복합 저층부
2만 평 규모의
'페스타 포레몰'이 나타났다.
유리 외장은
햇빛 속에서도
텅 비어 보였고,
준공 1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점포는
셔터조차 달리지 않았다.
한쪽은 100년 동안
같은 시간에 불이 켜졌고,
한쪽은 준공 1년 동안
불이 꺼져 있었다.
***
전쟁은 멀리서 타올랐지만
그 폐해는 고금리가 되어
전국의 현장을 식혔다.
자본은 움츠러들었고,
투자는 멈췄으며,
빈 점포의 셔터는
더 오래 내려져 있었다.
대다수 시행사의 숨은
말라가고 있었고,
몰도 마찬가지였다.
김서준은 1층 광장 끝자리에 서서
49층까지 곧게 치솟은
타워를 올려다봤다.
지상 4층까지 이어진
유리 커튼월,
그 뒤로 드러난 콘크리트와
철골의 뼈대가
겹겹이 맞물려 있었다.
장대동 한복판에
2만 평짜리 덩치가
하늘을 잘라 세워진 느낌이었다.
도면으로 보던 숫자보다,
눈앞의 건물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모든 설비가 준비됐지만,
사람은 없었다.
김서준은 천천히 걸었다.
발소리가 울렸다.
1층 로비를 지나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에스컬레이터는 멈춰 있었고,
손잡이 위 먼지는
사람 손 모양 그대로
오래된 지문을 품고 있었다.
한때 매장 이름을 붙였던
테이프 자국만 유리 위에 남아
희미한 글자를 흉내 내고 있었다.
복도를 걸었다.
천장 조명 절반이 꺼져 있었고,
바닥 타일 사이로
낙엽 하나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곳은 쇼핑몰이 아니라
폐허였다.
김서준은 멈춰 서서
그 낙엽을 오래 바라봤다.
빈 공간은
가격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시간과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
먼저 살리고,
나중에 팔아야 한다.
건물을 나와
다시 천변 쪽으로 걸었다.
한기준이 노트북을 펼쳤다.
"입지를 분석해 보니,
장대동 복합터미널 기준 반경 500m 내,
유동 인구 하루 평균 1만 3천 명.
서울과 부산은 1시간 30분대,
1일 생활권입니다."
"유성5일장은 100년 전통으로,
장날 유동 인구는
2만 5천 명입니다."
"인근 주거단지는
재개발된 아파트 5천 세대,
단독주택 2천 세대,
총 7천 세대입니다."
"하지만 젊은 층은
5킬로 이내 거리의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를
주로 이용합니다."
"상인들은 고령화됐고,
공간은 낡았습니다.
현재 유성5일장은 경쟁력이 없습니다."
김서준은 천변을 바라봤다.
"터미널에서 장대동까지
찾아오기가 불편하네요"
김서준이 지도를 펼쳤다.
터미널에서 유성5일장까지,
그리고 몰까지의 거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실을 채우려면,
접근성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
공실 해소 전략회의는
사흘에 걸쳐 진행됐다.
AMD 팀, 지역 중개사, 시행사,
유성구청 도시재생팀장,
카드사 데이터 분석팀,
그리고 유성5일장 상인 대표
5명이 모였다.
한기준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펜촉이 보드를 긋는 소리가
짧게 났다.
"죽어가는 큰 상권을 살리려면,
우리보다 10년 먼저 망했고,
10년 먼저 버텼던 나라인
일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큐부동산의 시부야,
모리빌딩의 롯폰기 힐스,
미쓰비시의 마루노우치."
글자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찍었다.
"원래는 다 낡은 동네였습니다.
철도만 지나가고,
낡은 빌딩과 공실이
섞여 있던 곳이었죠."
그는 펜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 동네들이 도시재생을 통해
지금 같은 상권이 되고,
십 년, 이십 년씩 매출과 임대료를
버티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스크린에 두 줄이 떴다.
[TOD : Transit-Oriented Development]
교통 중심 개발
[Area Management]
지역 운영 체계
김서준이 첫 줄을 가리켰다.
"먼저 TOD입니다.
지하철역, 버스터미널,
환승센터를 중심으로
업무·상업·주거를
도보 5~10분 안에
압축해서 배치합니다."
"사람이 내리는 곳과
돈을 쓰는 곳의 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겁니다."
화이트보드에
동그라미 셋이 그려졌다.
[역]–[상가]–[주거]
"출구에서 비 안 맞고
바로 들어가는 동선,
지하·지상 데크 연결,
낮에는 직장인,
저녁엔 거주민이 채우는 동선."
"이게 되면 유동 인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모여드는' 겁니다."
그는 두 번째 줄로
시선을 옮겼다.
"그다음이
에리어 매니지먼트입니다."
스크린에 새 문장이 떴다.
[개발 이후에도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지역을 '운영·브랜딩'하는 체계]
"건물을 짓고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의 회사나 조직이
이 지역의 '집주인' 역할을 계속합니다."
"임대료 수준을 조절하고,
업종 구성을 조정하고,
야간 조도, 청소, 치안,
거리 공연, 이벤트까지…."
"길 하나, 간판 하나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겁니다."
그는 짧게 덧붙였다.
"시부야, 롯폰기 힐스를 가보시면
간판 높이, 조명 색,
노점 위치까지
제멋대로인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게 에리어 매니지먼트입니다.
상권을 '내버려 두지 않는' 체계."
화이트보드 한쪽에
작게 세 단어가 적혔다.
[유입]–[체류]–[재방문]
"TOD는 '유입'을 만드는 일이고,
에리어 매니지먼트는
'체류'와 '재방문'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일본의 성공 상권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숫자를
매일 체크하고 있습니다."
그는 펜을 내려놓고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자, 이제 우리가 만들려는 몰을
여기에 어떻게 얹을지 보겠습니다."
한기준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장대동 일대 항공사진 위에
빨간 선이 그려졌다.
[복합터미널]에서 시작해 [지하철역],
[유성5일장], [몰]을 잇는 동선.
"이 구간이 우리에게는 시부야 역세권입니다."
"첫째, 역과 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 안에 몰 입구에 닿게 만들 것."
"둘째, 이 건물을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로
설계하겠습니다."
김서준은 화이트보드에
크게 세 단어를 썼다.
볼거리 / 먹을거리 / 즐길거리
한기준의 눈이 반짝였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지하는 보는 이유가 있는 층입니다.
유리 월 연습실에서
아이돌 연습생들이 땀 흘리고,
지하 라이브홀에서는
200~300석 규모의 쇼케이스와
데뷔 무대가 열립니다."
"공연장에 못 들어간 사람들은
1·2층 카페 모니터로
그 무대를 같이 봅니다."
"80~120석 규모 소극장 2개에서는
대학로에서 월세 때문에 쫓겨난
연극배우·창작극단이
매일 밤무대에 섭니다."
한기준이 층별 MD(Merchandising)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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