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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Mar 25. 2024

#17. 나의 질병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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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픔은 늘 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래가는 몸살을 앓을 때도, 스쳐가는 감기를 맞을 때도 처음 통증이 시작되는 곳은 늘 목이었다. 목이 따끔거리며 아프기 시작하면 나는 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대번 알고, 그럴수록 되도록이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모든 신호는 목에서 보낸다. 그렇게 나는 나를 조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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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정말 괴로울 만큼 아팠었던 기억은 구체적으로 서너 개 정도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대학에 막 입학했을 당시 신입생 MT에서 나는 크게 앓아누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나도 대학생이 되었다며 며칠은 완전히 체력을 다 써버릴 만큼 밤새도록 놀고선 바로 신입생들이 동기와 선배와 친해질 수 있는 신입생 MT에 참가했고 곧 사달이 났다. MT는 무려 2박 3일의 일정이었는데, 그 며칠간 무리해서인지 고열이 나면서 바로 앓아눕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신입생들이 들뜬 마음을 안고 선배와 동기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을 때 나는 홀로 방 안에 누워 낑낑거리며 그 뜨거운 밤이 그저 빨리 지나가 버리길 고대했다. 때마침 잠시 찬 물을 마시겠다며 방에 들어온 선배 한 분이 내 이마를 짚어보더니 몸이 불구덩이처럼 뜨거운 것을 알고 급하게 해열제와 감기약 등을 입에 털어 넣어주었다. 당시 내 몸의 열은 거의 40도를 육박할 만큼이나 뜨거웠고 해열제를 먹고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열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몸은 금방 멀쩡해졌지만 열이 내릴 때까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배들이 수시로 내 상태를 돌보아주었고, 열이 빨리 가시도록 이마의 물수건을 정성스레 바꿔주었다. 선배들의 배려 덕분에 몸은 꽤나 빨리 회복될 수 있었고, 그 덕에 여남은 MT를 별 탈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신입생 때 들었던 수업 중 하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교내에서 실시하는 모의 TOEIC을 응시해야 했다. 시간이 있을 때 빨리 쳐버리려고 신입생 MT가 끝나는 다음 날 호기롭게 시험에 응시했다가 결국 시험 중간에 양쪽 코에서 코피를 쏟게 되었다. 절대 중간 퇴실이 안 되는 TOEIC 시험장에서 예외적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코피가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서 피를 활켜대었고 겨우 코피가 멎을 때가 되니 시험 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내 첫 TOEIC 시험은 문제를 풀어보지도 못하고 시험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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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앓았던 적은 군 시절이다. 나는 해군병 출시인데, 교육 훈련 중 진해의 시루봉 근처에서 약 일주일간 숙영 하며 사격, 유격, 행군 등의 교육을 받는 주간이 있다. 숙영지에 가서 첫날을 보내고 밤에 이부자리를 펼쳤는데 뽀얀 먼지가 가득 나와 많은 거부감이 들었으나, 처했던 환경이 환경인지라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잤는데 만 이틀이 지난 이후부터 목에 통증과 함께 기침이 시작되더니 이내 정신을 잃을 것처럼 열이 들끓었고 정신을 차리기가 매우 힘들었다. 군의관 면담을 앞두고서는 도저히 꼿꼿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훈련병이었음에도 환자 대기석에 쓰러지듯 누워있었고 곧 군의관 면담을 하게 되었다. 군의관은 내 몸상태를 살피더니 급히 구급차를 준비시켰고, 그렇게 난생처음 구급차를 타고 군 병원에 실려갔다. 내 병명은 폐렴이었다. 바이러스나 진균을 흡입했을 때 발생하는 병이라고 했다.

 사실 지금도 의문인 점은 많은 동기들 중 왜 나만 심하게 감염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훈련병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약 일주일간을 훈련도 받지 않은 채 군 병원에서 요양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아무래도 군 병원이다 보니 역시 군대식으로 점호를 했는데 간단히 인원 점검을 마치고선 각자에게 맞는 약을 현장에서 투약하고 그 약을 환자가 직접 먹는 것까지 모두 확인을 했다. 군 병원에서도 많은 분들의 도움덕택에 빨리 회복될 수 있었고, 훈련병의 신분을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구급차를 탄 경험이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으로 보살핌을 받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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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스리랑카에서 겪은 인플루엔자였다. 어느 날 KOICA의 한 친구가 총괄하는 행사에 다녀와서 간식으로 햄버거를 먹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목에 통증이 시작되더니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저녁을 먹고 조금 쉬면 나아질까 했는데 다음 날이 되어도 아픔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이어 호흡기 증상에 이어 전신에 근육통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점점 아픔은 짙어져 혼이 나가는 듯이 아팠고, 마치 주마등도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내 상태에 대한 검진을 받으러 현지의 병원에 갔는데 진료실 내 틀어진 에어컨 바람에 정말 피부가 쓰라리듯 고통스러웠다. 그탓에 한 여름이었지만 병원의 에어컨을 꺼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겨우내 약을 받아 사무실의 침대에 누웠다. 내 걱정을 한 직원들이 입에 약을 털어 주었지만 목의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삼킬 수가 없어 뱉어내었고, 몇 번의 사투 끝에 겨우 약을 삼키고 나니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다만 내가 먹은 약은 임시로 열을 떨어뜨리는 해열제였고, 인플루엔자 약을 투약받기 위해서라면 최소 하루 이상은 입원을 했어야 했다. 하루 입원을 한 끝에 겨우 처방약을 받아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번 경험 역시 입원부터 투약과 퇴원까지 주변인들의 사랑으로 아픔을 물리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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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경험은 코로나 바이러스이다. 터키 여행을 하고 귀국하기 전 날, 목이 엄청나게 따끔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통증이 가득했고 하루종일 피로감이 가득했다. 터키 여행의 마지막날이라, 현지 친구들과 함께 Starbucks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를 마시다 왈칵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그만큼 몸이 안 좋았음을 느꼈다. 다행히도 통증이 시작되기 전에 귀국용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는 다 받아 놓은 상태였기에 귀국 절차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억지로 공항에 몸을 이끌고 가서 수 시간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저녁 늦게 한국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방역 기차를 타고선 밤 아주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루 휴식을 취하고 나니 본격적으로 코로나 증상이 발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한창 유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 증상 중 하나가 잘 때 땀을 흘린다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한 잠을 자고 일어나니 온몸에 땀이 억수같이 흘렀고 기침과 가래가 끓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 후 받은 코로나 검사에서는 음성이 나왔다. 음성 결과지를 받았음에도 증상은 도저히 가시지를 않았다. 당시 해외에서 귀국한 인원은 필수적으로 14일간 격리를 해야 했는데, 무려 14일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은 가시지가 않았고 결국 귀국 16일이 지나 최종 검사를 받으니 그제야 나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무려 14일을 더 격리를 해야 했다. 그래도 국가에서 격리자를 위해 생존 물품을 보내주었기에 그것을 먹으며 버텨내었고,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다음에야 점점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증상의 피로감은 엄청났기에 정말 하루의 반 이상 수면을 취해야 했다. 약 한 달간 격리를 하면서 정말 잠을 많이 잤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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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던 때는 늘 목으로부터 통증이 시작되었다. 목에서 통증이 시작될 때면 나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게 아프게 앓다가 누군가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다시 건강이 회복된다. 아픈 것은 싫다. 다만 내가 아플 때면 여태 누군가 나를 보살펴 주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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