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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직업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직업 상담사’는 말 그대로 한 구직자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고 면담과 상담을 통해 취업 연계를 해주는 직업이다.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밝혀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본인의 업무 만족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라고 했다. 다른 이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정답이나 그에 준하는 실마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이 일을 하는 큰 원동력이라고 했다. 다만 그녀에게는 그 직업의 단 하나의 단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본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 본인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혹은 이 일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참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직업 상담사가 자신의 직업을 고민하는 상황이었다. 일 자체는 재미있고 만족감이 높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경쟁해서 국가사업을 따내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발전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대뜸 본인의 직업과 미래에 대해서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남의 직업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는 나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더하여 아무 이야기도 덧붙이지 못했지만 그녀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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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겪으며 일전에 교구청 내 한 상담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누나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누나의 역할은 상담객들의 접수를 받고 각종 행정을 돕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해당 상담소는 가정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하는 곳이었기에 그곳에 상주하는 상담사는 하루 종일 누군가의 가정 불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하루 종일 외도 혹은 불륜의 이야기를 듣는 날이면 상담사도 정신적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정신적인 고통이 무척이나 크다고 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며 상담사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졌는지 행정직을 보는 직원에게 자신의 일과 상황에 대해서 상담을 요청했었단다. 전문 상담사도 자신의 일이 고되어 타인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누나 역시도 나름의 업무적 스트레스에 더해 이러한 상황까지 겹치니 본인도 못 견뎌 다른 곳에 결국 상담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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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들이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갈고닦은 본인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초아(超我)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본인도 그 대상 중 하나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일전에 ‘행복 전도사’로 알려진 인물이 결국 자신의 명을 스스로 끊어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행복을 전도한다는 것도 결국 본인 역시도 행복을 전도당해야 하는 객체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딘가에 전문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대상이자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의사라고 병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변호사라고 자신의 모든 변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행복 전도사라고 본인에게 찾아오는 불행을 피할 수 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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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업계에 발을 담고 있지만 결코 여행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인의 여행을 그저 도와주며 여행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뿐.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지 않도록, 나의 모습을 살피는 모습이 단연 중요하다.
나라고 다 알까, 아니 나라고 무엇을 알고나 있을까. 사실 너도, 나도 아무것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