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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나의 새내기 시절. 나는 군입대를 앞두고 더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돈은 없었지만, 해보고 싶었던 것은 많았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으로 할 수 있는 경험들은 모두 찾아서 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관련된 동아리나 스터디를 모두 가입했고 그 단체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참여하며 전국을 쏘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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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때의 경험이란, 내게 짜디짠 바닷물과 같았다. 새로운 단체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마치 동굴 속에서 눈이 확 떠지는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는 듯했고, 이는 내 들끓는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새로운 유형의 사람을 만날수록, 가보지 못한 지역에 가볼수록, 나는 점점 더 고파져만 갔다. 더 만나고 더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닥치는 대로 부딪히는 삶을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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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 직전에 내가 골랐던 활동은 다름 아닌 봉사활동이었다. 한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사회공헌단체에서 약 3박 4일간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공지글을 보게 되었는데, 장소는 다름 아닌 강원도 강릉이었다. 생소한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숙식을 제공받으며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니, 내겐 정말 구미가 당기는 활동처럼 보였다. 그래서 무작정 담당자에게 전화 걸어선 이 활동에 참여해도 되냐고 당당하게 물어보았다. 행사 담당자는 잠시 당황하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나는 그렇게 난생처음 강릉으로 발길을 향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했던 봉사 활동은 지역 축제에서 각종 허드렛일을 하는 역할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 누나를 알게 되었다. 강릉 근처의 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교사를 준비하고 있는 누나였다. 3박 4일간 같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우리는 꽤 친해졌고, 봉사가 끝난 다음에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공허한 약속을 남기는 것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 이후로 연락이 이어질 일은 없었다. 우리는 사는 지역이 너무 멀었고, 무엇보다는 나는 사회와 단절된 군대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단 한번, 그 누나와 연락이 이어진 적이 있다. 군대 생활 당시, 나는 전역일을 고대하며 전역일을 메신저 상태창에 기록해 놓았는데, 전역을 정확히 1년 앞둔 당일 누나에게서 1년간 고생했다며, 앞으로 딱 1년만 더 힘내라는 응원의 문자가 왔었다. 정말 고마웠고, 정말 큰 힘이 났었다. 단순히 나의 군생활을 응원해 준다는 차원을 넘어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까지도 나를 기억해 주고 또 응원해 주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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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느 관계처럼 우리는 서로 새까만 사이가 되었다. 가끔 그녀가 기억 속을 스치고 가더라도,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지 딱 10년이 지난 후,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사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그녀의 형상이나 목소리 등은 가물해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내 전화기에는 그녀의 연락처조차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수화기를 드는 순간, 나는 그녀임을 직감했다. 10년 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10년 전의 내 기억을 정확하게 되살려내었다. 10년이 지나서 그녀는 나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나의 현 상황을 줄줄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닿은 연락이기에 반가운 마음도 컸지만, 사실 의심스럽거나 혹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대화를 나누고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그녀는 그제야 용건을 이야기했다. 자기가 몇 년 전에 결혼을 했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집에 사정이 생겼다며 내게 어느 정도 금전을 요구했다. 10년 만에 나를 찾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돈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도와줄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곤 무거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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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의 아름다운 기억이 순식간에 부패하는 기분이었다. 대학 시절 대외활동을 통해 알게 된 남자에게 1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금전을 부탁하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신기한 일이었다.
한편, 새로운 인연을 그리도 바라던 내가, 오랜만에 닿은 지인의 연락도 조금은 두려워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그녀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이따금씩 안타까운 처지에 처한 나의 옛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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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며, 정을 주기가 무섭다.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