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길이 있다
우리는 매일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이 중 상당수는 세상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한다.
그러면 왜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그 이유는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우선 부모님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생명을 주었지만 그림자처럼 내 선택 면면을 졸졸 따라다니는 무거운 존재. 그 외에는 주변의 인정이다. 주변에 친구도 별로 없는데 그 사람들에게 임팩트를 주고 싶어 안달이다. 또는 처음 볼 사람들, 그리고 스쳐갈 사람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선택할 완전한 자유가 있는가?
현실적으로 세상의 압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돈을 벌고 내 한몸 건사하려면 세상의 입맛에 맞춰야 하는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가? 올바른 훈육방식을 가진 부모라 해도 갈등이란 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님에게 물리적으로 의식주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정신적으로도 유일한 세계이자 사회인 가족과의 갈등에서 어린 아이는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인생의 항로를 선택함에 있어 압박에 놓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드넓은 대지 위에 있지만 남들이 이미 밟아서 난 길, 잡초가 없는 길, 구불구불한 길, 선두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빽빽히 줄을 서서 걸어가고 있는 저 길을 가야만 한다는 주변의 외침을 끊임없이 듣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길이 없는 곳에는 표지판도 많다. 그쪽은 길이 없습니다. 그 길을 걷는다면 당신은 외톨이가 됩니다. 분명 저 뒤에 길이 있는데.
사실 이 길을 걷지 않는대도 아무렴, 상관없다. 어차피 이 길을 걷는 것은 내 두 다리이고, 결과를 받아내는 것도 온전히 내몫이다. 우리가 그 길에서 벗어나서 돗자리를 펴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뒹굴- 뒹굴- 해도, 갑자기 뱅글뱅글 돌고 다리를 쭉 쭉 뻗으며 발레를 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이 대지 위에서 일용할 양식만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가? 어디에 길이 있을까? 저 표지판을 들어내면 길이 있지는 않을까? 고서를 찾아보면, 외서를 찾아보면, 나보다 앞서 길을 찾고 한글이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길들을 찾는 저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나다운 삶이란, 결국 이 대지 위에서 내 스스로 일궈낸 길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대부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어떤 길 위에 있다. 그 길이 칭송받는 길이든, 덜 알여진 길이든, 보통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이든. 그런데, 내가 지금 이 길을 걷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길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계속 돌아봐야 한다. 쉽고 편한 길을 찾자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고통, 내가 참아내고 있는 어려움 뒤에 내가 원하는 삶이 있는게 맞는지, 저 뒤가 아닌, 주변만을 바라보며 이 길을 선택한 건 아닌지 계속 점검해야 한다.
다시 이러한 다짐을 나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해보자면 이렇다. 우리 회사에 있는 많은 부서들 중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거나 멋져보이는 곳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은 비주류라 일컬어지는 부서라고 하더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고민 없이 선택할 것이다. 내 삶을 살면서 주위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누가 잘하나라는 프레임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았는지를 가장 선명한 프레임으로 사용할 것이다. 누가 나를 상처주더라도, 회사에서 사람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는게 도움될때가 있더라도,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특성을 유지할 것이다.
어떤 길로 가야할지를 찾아볼때 주변이 아닌 내 스스로에게 물어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반응을 다만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누가 싫어할 것이고 누가 좋아할 것이다 정도를 예측하되, 사실로만 받아들일 것이다. 조언을 구하고 싶을때, 주변이 아니라 책, 나의 마음, 나의 우선순위에서 구할 것이다. 다만 그에 따른 선택의 결과, 그것은 인생이려니 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내 삶은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낼 것이다. 이것은 내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