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끝나가는 2월 말이다. 오늘은 평창 오대산에 가기로 하였다. 출발할 때는 맑던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평창으로 넘어가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역시 강원도의 날씨는 안심할 수 없다. 오대산 월정사 입구인 병안 삼거리까지는 진고개에 자전거 타러 갈 때 몇 번 지나갔는데 삼거리 이후부터는 나도 처음이다. 조금 들어가니 월정사 매표소가 있어 성인 입장료와 주차료까지 내고 들어간다. 입장료가 비싸다 싶었더니 가는 길에 박물관도 있지만 오늘은 등산을 해야 하니 시간이 없다. 걷는 거리를 줄이려면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까지 가야 한다.비포장길을 조금 올라가니 승용차들이 눈길에 미끌려서 앞을 막고 한참 빌빌거린다. 못 가면 비켜줬으면 하는데 오도 가도 못하나 보다. 역시 강원도의 겨울에는 4륜 자동차가 쓸모가 있다.
상원사 입구 주차장은 작지 않은데도 만차다. 다행히 관리사무소 근처에 공간이 있어 편하게 주차하고 출발한다. 3월 직전이라 아이젠이 아직 필요하다 싶었는데 가져오길 잘했다. 눈이 많이 쌓이진 않았을 테니 스패츠는 가져가지 않기로 하고 스틱과 아이젠만 챙겨 출발한다. 당분간은 포장길이니 아이젠은 등산로 앞에서 쓰기로 한다.
오대산은 국립공원이면서 이 일대는 모두 월정사의 사유지라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을 것 같은 사찰이다.
오늘은 여기 상원사 입구에서 해발 1,563m의 오대산 비로봉까지 왕복하기로 한다. 1,563m라니 만만찮아 보이지만 출발 고도도 이미 충분히 높다.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을 지나 적멸보궁 입구까지는 등산로라기보다는 계단이 많은 도보길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슬슬 걸어간다. 등산을 할 때는 자전거 탈 때처럼의 사전조사를 안 하다 보니 길을 잘 모르지만 어차피 국립공원이라 이정표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온 김에 상원사는 들러보기로 했다. 이정표를 따라가니 번뇌가 사라지는 길이 나온다. 번뇌란 쉽게 말하면 악업이 일어나게 되는 고요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한다. 번뇌가 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반부터 돌계단을 올라가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상원사로 들어가게 된다. 마침 무슨 행사를 하는지 입구에서 발열 체크를 하는데 우리는 행사 참여자가 아니라 사찰을 그대로 통과하는 등산객이라 간단히 발열체크만 하고 지나간다.
상원사는 상당히 오래된 절로 6.25 전쟁 때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ㄱ자로 된 사찰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불상도 있다고 하는데 행사로 사람이 많으니 근처도 가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다.
나가는 길에도 달마대사가 우리를 쳐다본다.
상원사에서 빠져나오면 해우소가 있다. 여기 해우소에서 등산로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일단 적멸보궁까지는 좋은 길로 가기로 한다.
적멸보궁에서도 무언가 행사가 있는지 등산객이 아닌 불교 신자들이 여럿 올라간다. 그래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다.
계단을 올라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여기까지는 관계 차량들이 드나들 수 있다.
여기서 적멸보궁까지는 계단이라 물자 운송은 따로 작은 레일을 설치해놓았나 보다.
이제 중대 사자암으로 올라가야 한다. 안내 지도를 잘 보면 중대 사자암 외에 북대 미륵암, 서대 수정암, 동대산이 보인다. 여기에 남대 지장암까지 동서남북의 대가 있고 오목하게 분지 지형을 이룬다고 한다.
아주 잘 닦여서 오르기 어렵지 않은 돌계단을 올라간다. 석등으로 보이는 동그란 석상들이 줄지어 있는데 안쪽에 스피커가 있는지 불경 소리가 들린다.
올라가다 보면 중간에 상원사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여기로 가면 아까 상원사 화장실 앞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다. 내려올 때는 이리로 갈 생각이다. 적멸보궁까지는 0.7km, 비로봉 정상까지는 2.2km 정도 남았다고 한다.
날이 흐리지만 눈이 온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앙상해야 할 나무에 눈꽃이 피어 마치 목화밭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올라가다 보면 곧 중대 사자암에 도착한다. 적멸보궁까지는 더 가야 한다. 어쨌든 잘 닦인 길로 가니 등산이라기보단 산책에 가깝다.
오래되어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숲 사이를 올라가니 기분이 좋다.
드디어 적멸보궁 입구에 도착했다. 등산객들은 여기서 등산로로 가야 하고 불자들은 계단을 더 올라서 적멸보궁으로 가야 한다.
비로봉까지 실제 등산로는 1.5km 남짓이다.
등산로에는 눈이 쌓여 있으니 안전을 위해 아이젠을 착용한다. 등산은 항상 방심하면 안 된다.
이제 본격적인 등산의 시작이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능선 쪽은 보이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말로는 비로봉이라는 봉우리들은 올라가야 비로소 보인다고 한다.
등산로도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어렵지 않게 올라간다. 바위 사이로 줄 잡고 철 발판을 밟고 올라가는 어려운 등산로보다 그냥 안전한 이런 길이 좋다.
그래도 등산로라고 오르막길을 오르니 힘은 든다. 이정표가 딱 절반을 왔음을 보여준다.
눈 쌓인 등산로를 걸어가면서 설경을 만끽한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2월 말인데도 상고대가 남아있다.
침엽수들은 눈을 한 아름 끌어안고 있다.
중간에 작은 쉼터가 있다. 밴치 아래에 등산객들이 뭘 흘렸는지 산새들이 와서 요기를 하고 있다. 내려올 때 우리도 여기서 간식을 먹어야겠다.
뜻하지 않은 눈꽃 산행에 지니님도 즐거운가보다. 이제 비로봉까지 얼마 안 남았다.
이정표가 참 자주 나온다. 얼마 안 남았다고 해도 등산로는 등산로인가 보다. 200m가 생각보다 멀다.
마지막 계단인가 보다. 계단 위에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드디어 정상에 가까이 가야 비로소 보인다는 비로봉이다.
해발 1,563m 오대산 비로봉에 도착하였다.
다섯 개의 대대가 오목하게 원을 그리고 있다 하여 오대산이라 하는 줄 알았는데 다섯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여 오대산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지니님은 요즘 등산할 때마다 셀프 인증샷을 찍는데 열심이다. 난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인증샷이 뭔지 자꾸 사진 찍어야 해서 귀찮다.
산 정상은 여러 갈래에서 올라온 등산객들로 붐비기 마련이다.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른 등산객들이 오기 전에 하산한다.
아까 봐 뒀던 밴치에서 간식을 먹기로 한다. 어제 마트 할인 코너에서 집어온 김밥과 과자로 요기를 한다. 맛있어 보였는데 냉장고에 오래 두어 밥이 딱딱해져서 아침에 김밥집에서 싸오는 김밥만큼 맛있질 않다.
아까는 여기 쉼터에 귀여운 박새들이 있더니 시커먼 까마귀들이 몰려왔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구는데 주고 싶지 않다..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 오늘 등산 코스는 아주 쉽고 편하다.
진입 차단기를 넘으면 적멸보궁 입구까지 얼마 안 남는다.
내려오는 길에 날이 점점 맑아진다. 그래도 상왕봉 쪽 정상은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적멸보궁 입구로 돌아왔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적멸보궁인데 무슨 행사가 있어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들러보지 않는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다고 한다.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까지 총 다섯 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불자가 아니다 보니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기회가 되면 또 들르게 되겠지.
날이 맑아지니 기온도 올라간다. 근처의 눈도 점점 녹는 듯하고 나뭇가지에 피었던 눈꽃도 물방울로 맺혀버린다. 마치 실시간으로 봄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중대 사자암을 지나 바로 아래에 아까 봐 두었던 갈림길에서 등산로로 상원사까지 가기로 한다. 똑같은 길을 왕복하는 건 왠지 지루하니 최대한 다른 길로 가고 싶다.
어렵지 않은 적당한 등산로가 계속 이어진다. 가장 좋은 것은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적한 길이라 그런지 눈 앞에 다람쥐가 나타났다. 녀석은 사람에 익숙한지 우리를 경계하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다가 사라진다. 역시 다람쥐는 우리나라 산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귀여운 동물 중에 하나다.
등산로를 쭉 내려오면 상원사 화장실 앞에 도착한다.
돌길을 따라서 쭉 주차장까지 내려가면 오늘 일정도 끝이다.
오대산은 사실 별 관심이 없었고 해발 1,500m가 넘는 산이다 보니 올라가기 힘들겠거니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었는데 어찌어찌 이번에 다녀오게 되었다. 오대산을 올라가는 더 어려운 코스도 있었겠지만 이번에 다녀온 상원사 왕복 코스는 등산보다는 약간 힘든 산책에 가까운, 쉬우면서도 좋은 코스였다. 예상치 못하게 눈이 와서 눈꽃 산행이 된 점은 역시 야외 활동에서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90%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이번 겨울의 마지막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