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과 지니 Feb 20. 2023

존과 지니의 뉴질랜드 남섬 자전거 여행 3

티마루에서 오아마루까지 86km

2023년 12월 25일 - 뉴질랜드 남섬 자전거 여행 3일 차


경로 및 거리: 티마루(Timaru)- 오아마루(Oamaru) 86km

총 이동거리: 249km


죽음의 크리스마스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뉴질랜드에 여행가면 안 된다. 아무 것도 없다. 식당도, 슈퍼마켓도, 매점도, 카페도 어지간한 곳은 열지 않는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따로 나오는 숙소에서 간신히 씻고 어쨌든 잘 잤다. 아침에 식사를 해야 하는데... 여행지에서 여러 모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맥도널드도 오늘 만큼은 늦게 연다.


티마루에서 벗어날 때까지 문 연 식당이나 슈퍼는 하나도 없다. 아무 것도 안 먹고 달릴 수는 없으니 티마루 경계의 공터에 잠깐 멈춰서 가지고 있는 비상식량들을 최대한 챙겨 먹는다.  


하늘도 푸르고 땅도 푸르고 내 뱃속은 허하다.


오늘도 전체적으로는 평지 같지만 약한 오르막 내리막의 반복이다. 이런 곳도 구글 지도에선 고도표 하나 안 보여주고 대체로 평지라고 나온다. 구글 놈들은 이런 완만한 평지에서 죽도록 달리게 해야 한다.  


오늘도 1번 국도를 달려야 한다. 갓길이 넓은 곳도 있지만 좁아지거나 포장이 망가져서 달리기 힘든 곳도 많다.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 급으로 뉴질랜드 남섬을 대표하는 도로가 이 모양이다. 자주 지나가는 크고 긴 우유 트럭들이 굉음을 내며 바짝 붙어 지나가면 빨려들어갈 것 같이 무섭다. 여기는 유럽이 아니다. 우리나라랑 별 차이 없을 만큼 운전자들의 매너가 없다.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1번 국도는 대부분 1차선 도로인데 중간중간에 이렇게 추월 차선이 있다. 이게 전부다. 1번 국도가 이 정도고 작은 도로들은 이런 추월 차선도 없는 곳이 태반이고 비포장길도 많다.


오늘 목표인 오아마루까지 중간에 계속 마을이 있긴 있다. 마을이래봐야 우리나라 '리' 급도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라 식당이나 매점은 커녕 민가도 몇 개 보이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다.  


오늘도 허허벌판을 달린다.


넓은 녹지와 500만 명의 뉴질랜드 사람보다 몇 배 많다는 2600만 마리의 양들... 양들에게 지성이 생겨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뉴질랜드는 단번에 점령될 것이다. 도로 가에는 거의 항상 요철이 박혀있다. 워낙 심심하게 운전해야 하니 졸다가 사고나는 것을 방지하려고 만들어놓은 듯한데 우리 자전거한테는 참 짜증나는 장물이다. 갓길이 온전하지 않은 곳이 많고 다리에서도 갓길이 없기 때문에 저 요철을 넘어서 도로로 들어가야 할 때가 많다.


소도 무시하면 안된다. 소도 천만 마리 정도 된다고 한다. 근데 우유는 왜 싸지 않은 걸까...


점심시간이 지나도 먹을만한 식당이 안 보인다. 일부러 마을 쪽으로 들어가 보아도 다 문 닫은 곳 뿐이다. 배고프다. 기독교 국가에 크리스마스에 놀러 온 것이 최대의 잘못인 듯하다.


모르벤(Morven)이라는 마을에서 글레네이비(Glenavy)라는 마을까지 1번 국도를 벗어나서 한적한 길을 달릴 수 있다. 그리고 약간 지름길이기도 하다.


1번 국도를 벗어난 김에 잠시 쉬어간다. 나무 같은게 없으니 쉴 곳도 마땅치 않아서 적당한 남의 집 입구 잔디밭 성벽같은 울타리 나무가 만든 그늘에서 쉬는게 최선이다.


아주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니 기분이 좋다. 뉴질랜드에 오면 이렇게 자전거를 탈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좁아터진 1번 국도에서 바짝 붙어 지나가는 차들에 시달리기만 했다.


시골길 끝의 글레네이비란 마을에 도착하면 슈퍼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다.


그래도 여기서부터 오아마루의 예약해둔 숙소까지 23km 정도 남았다. 그냥 포기하고 오아마루까지 달린다. 뭐든 먹을 게 있겠지... 오아마루에 도착하니 작은 매점 같은 것이 열려 있다. 튀김기에 쩔어 있는 통닭도 파는데 음료수만 사다가 열심히 먹는다. 뉴질랜드는 음료수도 500ml 한 병에 4달러(약 3,200원)로 우리나라보다 비싸다. 달리면서 문 연 가게들을 파악해둔다. 지니님이 포스퀘어가 문 연 것을 봐두었다. 작은 매점 하나, 이상한 중국식당 하나... 그 정도.


오늘 숙소는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운영하는 모텔이다. 모텔은 말 그대로 미국처럼 1층이나 2층 정도로 늘어선 긴 건물에 자기 숙소 바로 앞에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숙소다. 우리는 자전거라고 2층 방을 줬는데 자전거는 또 뒤쪽에 안 보이는 곳에 두라고 한다. 어지간해서 방 안에 둘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대충 짐을 풀어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간다. 문을 연 곳이 몇 안 되는 중국 식당들 뿐이다. 그 중에서 이제 운영 안하는 역 건물의 중국 식당에 가본다. 건물 자체는 허름하고 오래된 느낌이고 휴일이라 그런지 주인이 혼자 일한다. 약간 짭조름한 고기 볶음과 새우가 듬뿍 들어간 볶음밥을 주문해서 먹는다. 맛있다. 오늘은 성탄절...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하루 종일 굶겼지만 악착같이 장사하는 중국 사람들 덕분에 살아났다.   


저녁 먹는 사이에 비가 쏟아지더니 잠시 기다리니 금방 개인다. 참 이상한 날씨다.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경험할 수 있는게 뉴질랜드 날씨라고 하니 이 정도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뉴질랜드 철도는 오클랜드부터 크라이스트처치까지만 여객 운송을 하고 나머지 철도는 화물 운송만 한다.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그레이마우스까지 산을 넘는 산악열차는 관광 열차라 비싸다. 여객 운송을 안 하고 화물 열차도 하루 한두 번 다니니 여기 오아마루 역도 폐역같이 느껴진다.


저 끝의 해안에는 블루 펭귄 서식지가 있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굶고 배를 간신히 채우고 나니 가볼 여유가 없다.


배를 채웠으니 여유가 생긴다. 슬슬 걸어서 시내 상점가를 둘러보는데... 물론 문 연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자전거 가게에 산타 그림이 있지만...당연히 문이 닫혀있다. 여행객에겐 죽음의 크리스마스다.


숙소에 돌아가다가 내일 아침 먹을 걸 챙겨야 하기에 아까 봐둔 슈퍼로 간다. 날이 환한 데도 슈퍼는 8시에 문을 닫으니 부지런히 장보기를 끝내야 한다. 중간에 아랍 사람이 하는 작은 매점이 있는데 무언가 익숙치 않은 냄새가 나고 물건도 얼마 없다. 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까 지니님이 봐둔 포스퀘어 슈퍼에 가서 아침 먹을 것들을 챙겨온다. 여기 포스퀘어 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숙소로 돌아와서 창문을 보니 아까 비가 내린 것 때문에 무지개가 생겼다.


하루 종일 고픈 배를 참고 달리니 정말 힘든 하루였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야 차로 다닐테니 어떻게든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있겠지만 우리같은 자전거 여행객에게는 미리 대비하지 못한 뉴질랜드의 크리스마스는 지옥같은 하루가 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존과 지니의 뉴질랜드 남섬 자전거 여행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