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셋. 특권을 누려야 할 때(ps:마지막 인사)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한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가.’
젊었을 땐 몰랐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러나, 이젠 젊지 않다. 나이가 들었다. 어렸을 땐 멋있게만 느껴졌던 문장들이 이젠 절실히 이해되면서 가슴이 저민다. 깊은 슬픔이란, 뒤늦게 깨달았음에도 당장 이룰 수 없는 여기서부터의 한 걸음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레프 톨스토이 저)의 첫 문장도 내겐 그랬다. 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니. 행복은 평범함 속에 숨어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하다가,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고 파멸에 이르러서야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내가 안나라면, 기차역에 뛰어내리기 직전이 아니었을까. 내가 키티였다면, 레빈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프러포즈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내가 알렉세이(안나의 남편)였다면, 내가 브론스키(안나의 애인)였다면, 안나와의 대화에서 한계를 느꼈던 바로 그날이 아니었을까.
지난날 중 하루만 다시 골라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의 그 지점은 어디인가. 눈을 감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 떠올려보자. 아마 저마다 지금 불행이라 여기는 씨앗의 날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단순히 현재가 고통스러워 행복했던 순간만을 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알고 있다면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후회와 미련이 없는 인생은 없을 테니까. 뻔한 질문에도 진중함을 장착하면 예상 밖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감 잡으셨는가. 당신의 그 순간이 언제이건 간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한 번은 시뮬레이션해야 한다. 되돌려 감기, 모니터링.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안나가 다시 돌아와 죽기 직전 기차역 앞에 섰다. 다시 돌아왔으니 ‘브론스키가 절대 잊지 못할 장소이니 내 고통을 죽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말 테야.’라는 생각은 못 하겠다. 사랑에 의지할 필요도, 개인적 욕망의 한계도, 죽음 자체로는 아무런 변명이 될 수 없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물론, 죽어봐야 더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유한한 인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비극의 상징이 되어 본 안나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그 선택 역시 ‘안 가본 길’에 대한 갈망이라면 안타깝다. 시간의 문제일 뿐, 니체의 영원 회귀처럼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안나에게서 다시 내게 돌아와 반문한다. 내 인생 내가 모니터링 해 보니, 뒤늦게 세상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게 된 여인 하나가 있다. 여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 생각과 ‘정말 그래야만 하나?’ 하는 생각들. 이 두 생각의 갈래는 늘 부딪히며 덩치를 불렸다. 특히, 몸으로 겪고 깨달은 생각은 미처 가늠하지 못한 권력을 마주 보게 했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조용하고 유연한 투쟁을 오랜 시간 견뎌야 한다는 비장함마저 인지하게 되었다. 가령,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깔끔하게 정리한 페미니즘적 통찰,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가르쳐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의 위험성’ ,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에서 언급하는 나이 듦과 아름다움의 의미 변화, 조앤 롤링의 끝없는 상상력의 산물 『해리포터 시리즈』는 내 모든 일상적 문제에 거리 두기를 가능케 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그들의 삶 자체가 내 의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반가웠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기준은 이렇다. 바로 힘들게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살 수 있겠는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편하더라도 외면하지는 못하겠다. 알아서 불편한 것보다,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어쩐지 내겐 더 서글픈 일이다. 내가 나이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예쁜 유리관 안에서 걱정 없이 밖을 관망하는 삶을 선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리관 밖에서 신음하는 자들의 울분과 희열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탁 트인 숲속 공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진공 속에서 자연산 공기를 원한다는 건 모순 아닌가.
지금 내 나이의 시간과 경험은 예쁜 유리관이라기보다 사용감 있는 내열 용기에 가깝다. 금이 살짝 가고, 흠집이 제법 나서 누군가에게 선보일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무슨 상관인가. 쉽게 깨질 염려가 없는데. 오랫동안 요긴하고 유용하다. 자꾸 보고 있으면 울퉁불퉁한 결이어도 유일무이한 디자인이어서 웃음이 난다. 흠집 하나마다 담긴 사연까지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정이 듬뿍 들었다.
아프지 않고 어떻게 건강을 챙기며, 울어보지 않고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샌드위치처럼 낀 세대라 톨스토이처럼 ‘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한 이유로 행복하다.’라고 여기는 참이다. 다들 비슷하게 고민하겠지. 연로하신 어른들을 챙겨야겠다는 마음과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팽팽할 때면 고민이 깊어진다. 어느 것 하나 중요치 않은 게 없다는 걸 아니까. 자식을 위한 마음이 부모를 위한 마음을 밀치고 올라오면 ‘이해해 주시겠지’하고 믿는다. 어쩌다 시간 내어 짧은 나들이라도 모시고 가면 자식들보다 더 기뻐하는 어르신들 모습에 ‘역시 오길 잘했다’ 싶다. 동전의 양면처럼 무엇을 하든 의미 없는 일은 없다.
뭘 해도 ‘꽝 없는 기계’라는 믿음이랄까.
문득, 그렇다면 중년도 꽤 괜찮지 않나, 싶었다.
더러는 가슴 철렁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안도감으로 마무리되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다. 진즉 퇴직했으나 잠깐 힘들어하다 새 아르바이트에 곧잘 적응 중이라는 선배, 승진이냐 자기 계발이냐를 두고 고민하다 두 가지 모두 실현 가능한 방법으로 결정했다는 친구, 암이었으나 치료를 잘 끝내고 전보다 더 찬찬히 즐기는 시간이 늘었다는 동료. 저마다 사연에 책임을 지고 묵묵히 지낸다. 주목받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을 나이이기에, 주고받는 눈빛 속에 애틋함과 겸손함이 깊게 스민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몰랐던 청춘이 그리운가. 그 청춘과 열정, 아름다움조차도 신화에 불과했다는 걸 모른 채 돌아가서 누리고 싶은가. ‘완전한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불나방처럼 기차역으로 뛰어들었던 안나가 당신에게는 그저 비극적인 문학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깊게 다루는 철학서인가.
우리 돌아가지 말자. 하늘의 기회라고 해도 말이다. 중년에게는 흔적을 딛고 피어오르는 평범함이 있다. 나는 그것을 ‘중년의 특권’이라 부르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레빈이 그랬듯, 삶의 의미는 고통스럽지 않은 적정 수준의 일상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년은 핑크빛 인생을 꿈꾸지 않는다. 파스텔 톤으로 갖가지 색을 아우르며 다가올 미래가 뿌옇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양념을 갖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맛있는 한 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베테랑 주부의 여유로움과 닮았다.
돌아갈 수 있는 청년의 한순간은 잊어버리자. 대신 돌아올 수 없는 중년을 그리자. 노년의 밑그림이자 신(新)중년 지혜로움의 찬란한 청사진이다. 가을 중턱, 서늘한 바람이 분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이제 특권을 누려야 할 때다.
“지혜란 젊음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깨닫는 것이다.”
-에픽테토스-
p.s: 그동안 라이킷 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28화를 끝으로 제 두번째 책 초고를 마무리합니다.
나머지 에필로그 작업과 퇴고, 투고과정을 거쳐 2026년 신간도서 출간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썼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힘을 잃지 않고 올 수 있었습니다.
헤매지 않았습니다.
좋은 글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교감하는 작업이라는 말, 해 보니 정말 그렇네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