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고독해서 좋을 때

1장 둘. 고독해서 다행이다

by 스쿠피

“오늘 동생 학원 걸어가는데 같이 좀 가줄 수 있어?”

“… 내가 왜?”


동생에게는 걸어가기 애매한 거리라 첫째에게 부탁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었다. 세상 고운 말만 골라 쓰는 아이였는데, 초등 고학년이 되고서부터는 점점 말대답도 뜸하고, 짧아졌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먼저 말 걸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작년 겨울, 일본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아이들과 내 짐은 큰 캐리어에, 신랑 것은 작은 캐리어 하나에 담아 갔는데, 여행 중 아이들 짐이 점점 늘어나 내 캐리어가 너무 무거웠다. 태블릿까지 챙겨 넣은 배낭까지 짊어지려니 어깨와 손목에서 통증까지 느껴졌다.


“신랑, 이 캐리어, 너무 무거워서 그러는데 신랑 거랑 좀 바꿔 들어요. 저기 역까지만요.”


“안 돼요, 내 짐도 많아요. 그리고 역까지 10분은 걸어가잖아요.”


이 인간이 진짜 내 남편이고 내 아이 맞나. 불현듯 이런 생각에 빠져들 때면 떠오르는 감정이 많다. ‘단란한 가족’에 대한 환상을 내가 여태껏 품고 있었나. 10년 넘게 공들인 관계에서 열과 성을 다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분석해 보면, 우리 관계는 오히려 거리가 생겼구나. 또 다른 포지션을 향해 각자 꿈틀거리고 있구나. 어찌해 볼 방도도 없이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표정에는 낭패감마저 깃든다. 그런 일들이 잔가시처럼 내 마음 곳곳에 깊숙이 박혀 무뎌지려 할 즈음, 깊은 고독에 못 이겨 잠을 설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그만한 잔잔한 충격에도 헤어 나올 힘은 다시 내가 길러내야 한다는 사실이 고단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동안 내가 첫째가 좀 컸다고 잔소리한 게 많긴 했어. 학교생활에다 학원 일정도 벅찬데, 동생까지 챙기라는 잔소리라니, 네 말투에 짜증이 서릴 만하다. 어린 너에게 의지하고 싶은 내 마음, 그 조급함이 너를 향한 말투에 배여 나왔어.’ ‘내키지 않았던 일본 여행에 억지로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신랑. 여태껏 정리 정돈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며, 짐도 각자 싸 가자는 비수를 던지고서는, 막상 여행 가서 짐꾼 취급했으니 그럴 만하지. 당신은 당신만의 방식이 있음에도 여전히 그 방식을 존중하기 힘든 내가 있는 거지.’


한 가지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더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든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라고 덤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써봐야 그도, 아이들도 변하는 과정이겠고, 나도 많이 지쳤으므로. 차라리 흐리멍덩해진 관계 속에서 나만의 고독을 가만히 지켜보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이 필요한 시간』(모리 히로시 저)에 의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위해 유일하게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이란다. 그는 공학도이자 소설가인데, 인간의 뇌는 문명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어서 그 한계치를 초과할 경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50대쯤 스스로 은둔생활을 택했다. 아침에 눈 뜨면 하고 싶은 목공 일하다가, 책 읽고, 이메일로 일하고, 드문드문 찾아오는 방문객과 소담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지내어도 별반 문제가 없단다. 물론, 그만의 생활 기반이 적이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가 분명하게 어필하는 것은 ‘고독한 시간은 절대 잔혹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상태야말로 진정한 가치 창조를 이루는 기회라고 이야기한다.


‘친근했던’ 내 가족들이 예전만 못하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때는 즐거웠고, 충만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빵빵했던 풍선이 바늘구멍만큼 뚫리어 바람이 새어나가기 시작하려는 지점을 누가 매번 예측할 수 있을까. 겪어보니 순서가 그렇다. 먼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와 같이 나타났다가, 그 연기에 정신이 혼미해진 후에야 주섬주섬 수습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지난 내 행동들도 돌이켜보고 점검하면서 의도치 않게 내 삶을 성찰하기도 한다. 얽힌 인연이 있는 한, 꿈처럼 그리는 자유는 누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시소처럼 때로는 무방비상태로 고독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고독해지려 애쓴다. 그런데도 어쩐지 가족관계는 어렵다. 기껏 부풀려 놓았는데 쭈글쭈글해진 풍선 모양새에 무척 당혹스럽다고나 할까. 당혹스럽다 못해 서글픈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북받쳐 오를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게 아니란다. 지극히 정상이란다.


『고독에 관하여』(요한 G. 치머만)에서는 “고독은 세상의 관습이 감추도록 종용하는 정서와 감정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북돋운다.”라고 한다. 여기서 ‘세상의 관습이 감추도록 종용하는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 주변을 둘러보자. 개인의 경험에서 사회적 관습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하는 시기를 찾아볼 때, 그 출발점은 가족의 형성 아닐까. 내 모든 투사의 결정체가 배우자요, 그를 선택하기까지 내 유년 시절 트라우마 이해 없이 지금의 결혼생활이 가능할까. 내가 꾸린 가족, 양가 집안, 내 직장, 다음 세대로서 열심히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아우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세상의 관습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애당초 벗어나기 어렵게 세팅된 상태였구나. 나는 어떻게 이런 조건들이 마련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용하는 관습에 맞추어 힘껏 달려왔다. 그러나 관습은 그런 나를 비웃듯 매우 정교하고 교활하게 진화했다.


‘남들 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너만 왜 특별하게 굴려는 거야? 왜 네 주어진 의무에 대해 자꾸 의심하고, 네 생각을 놓지 못해?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이런 관습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


관습에 길든 자아는 매우 집요하다. 누가 봐도 전략이 없으면 이기지 못할 게임이다. 착한 딸, 좋은 엄마, 훌륭한 아내, 현명한 며느리 모두 이미지일 뿐이지 않나. 내가 관습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무턱대고 살아갈수록 관습의 무게는 세련된 형태로 가중되어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뒤늦게라도 깨닫고 주변 정리를 좀 할라치면, 돌이킬 수 없는 각종 사회적 계약위반에 낙인이 찍힐 판이다. 이쯤 되면 ‘정신적 극기 훈련’이 따로 없다. 섣불리 “이 길이 아니었어!”라며 관습의 사슬을 과감하게 절단할 용기, 당신은 있는가.


생각해 보라. 결혼식장 신랑·신부 앞에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이해하지만, 더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더 넓은 세상의 관습에 입문하는 걸 환영해요.’ 하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산후조리원 산모에게 ‘그 아이가 축복이지만, 동시에 고통이기도 하답니다. 심지어 평생 가지요. 관습대로 살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라고 말할 거라면 차라리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 한다.

고독은, 이러한 관습적인 생각들로부터 우리를 놓아준다. 마치 우리에 갇혀 있던 망아지가 고삐 풀린 채 저 드넓은 잔디를 달리는 것과 같다. 자유로워진 정신은 그러면서 해묵은 우리의 꿈도 떠올리게 하고, 여전히 순수한 그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이 관습, 지금부터라도 미세하게 가지치기해보자. 혹 '잡념'이라는 이름으로 쓸데없이 덧나간 줄기나 이파리는 아닌지 따져보자.

이 나이에 자주 찾아드는 고요함은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익을 만큼 익어서 때맞춰 잘 나타나 주었다. 이 감정은 뒤늦게나마 내가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라고, 이렇게 쉬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러 온 것이다. 내가 고독할수록 자유로운 정신이 된다니. 가족들 생각도, 직장 스트레스도, 내 안의 수많은 자아가 지저귀는 소리도 내려놓는 시간. 좋지 아니한가. 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델스존의 선율이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니체의 아포리즘 또한 지독한 정신적 고독 없이는 나올 수 없었을 터.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충격 후 잦아드는 감정, 전쟁통에 가족을 하나둘씩 차례로 상실해야만 했던 아픔 후의 감정, 생리적 고독과 정신적 고독을 동시에 겪으며 종국에는 실존적 고독까지 잘근잘근 곱씹어내었던 시인들의 흔적, 관습대로 살아야 할 모든 이유가 깡그리 사라지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 그것이 예술이구나.


‘꼭 무언가를 남기고 말겠어’ 하고 마음먹는 강박과는 다르다. 나는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중급 단계의 내적 경험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내 안에도 숨어 있는 진짜 ‘자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고독의 의미를 누린 사람들은 끝내 스스로 숨은 자아를 남겼다. 그것은 할 게 없어서라기보다 고요함의 극치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사물에 대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런 고독이라면, 전혀 잔혹하지 않다.


“사물이 진정 표현적인 개념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고독할 때다. 그리고 우리가 고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그 부름에 응답하는 자신의 표현 활동을 통해서 뿐이다. …(중략)…

그래서 고독의 뿌리는 가장 깊은 사랑에 있다. 거기에 고독의 실재성이 존재한다.”

-『고독에 대하여』(미키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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