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하나. 저 중년, 맞습니다.
“엄마, 오늘도 특별한 하루 보내세요~꽥꽥!”
새벽 4시 알람 멘트가 울린다.
어느 날이었다. 사는 게 지겹고, 건조해서 둘째에게 부탁했다. 엄마가 기분 좋아지는 말을 좀 해달라고. 녹음도 할 거라고 했다. 침대 위를 뒹굴던 둘째는 맘껏 코멘트를 해대더니 대뜸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음. 완벽해. 이걸 엄마 휴대폰 알람으로 등록해야겠어!”
갑자기 둘째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문명의 편리함이 내 우울감을 시원하게 날려버린 순간이었다.
잊을 만하면 또 불면에 시달린다. 그러려니 한다. 오늘은 또 내 마음이 왜 이러나. 돌고 도는 잡념들이 엉킨 것을 가만히 느껴보다가 아직 멀었구나, 싶다. 여전히 내 안에 무슨 화가 이리도 많은지. 좀 나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제 그렇게 가라앉혔는데도 또 올라온단 말이지? 알았어, 알았다고.
새벽 명상을 하게 되면서 요즘은 혼잣말로 내 안의 나와 이런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원인은 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 나이 40대 중반. 전성기도 아니지만, 패잔병 신세는 더더욱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착각하게 되는 게 있다. 발령받은 순간부터 아이들과 누렸던 추억의 시간 속에 마냥 멈춰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 언제부턴가 미묘하게 아이들이 내게 와서 털어놓는 고민이 젊은 시절의 것과 다르고, 그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더 큰 책임을 의뢰하는 일이 많아졌다. 젊은 시절에도 그다지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교사는 아니었으나, 학생들에게 주는 신뢰감만큼은 아직 유효하다. 정중하게 교과 질문을 하는 아이들, 내 수업이 자신들의 진로 선택에 일말의 계기가 되었다는 말들, 더러는 졸업 후에도 진지한 인생 조언을 구하는 연락이 오곤 하니까.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그 제자들이, 아니 그 제자들보다 한참 어린 신규 교사도 같은 직장에서 업무를 하고 이견을 조율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와 나이가 엇비슷한 후배들도 일에 대한 프로의식이 대단하고, 신규 세대들은 웬만해선 자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학생들의 입에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그렇다. 그들이 암묵적으로 중장년층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를 내가 확연하게 느끼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뿔싸.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어쩌면, 앞서 말한 그 착각 속에 안주해 있느라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불감할 만큼 거리낌 없이 소통하다가도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시네요? 언제 적 얘기를?’ 하는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이 나이의 내가 싫지 않은데 아직 그들에게도 내가 필요한 존재임을 너무 잘 아는데 걷잡을 수 없이 서글퍼진다는 거다. 잊을 만하면 우울해진다는 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아쉬움과 ‘나는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가’와 같은, 존재에 대한 의문은 늘 바쁜 와중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만 이런가. 당신은 소위 말하는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가.
흔히, 중년(中年)은 중장년이라고도 하며, 청년과 노년 사이의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시대 문화적 요소를 고려할 때 연령대를 한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여기는 대한민국 아닌가. 젊은 중년이 늘고 있다는 말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20대에 결혼한 사람은 30대 초반을 넘어서도 중년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있고, 60대가 훌쩍 넘어도 스스로 젊다고 자부하며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당차게 갱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 유명한 에릭슨(Erikson)에 의하면, 중년은 인생의 7단계에 해당한단다. 이 단계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기여서 다음 세대를 인도하는 데 적극적인 참여를 하지 않으면, 침체감, 권태감, 대인관계 악화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그래서 간결하게 줄여 ‘생산성 대 침체감의 시기’라고도 한다. (참고로, 이때의 생산성이란, 자녀 양육, 타인에 대한 배려, 차세대로의 나눔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옳거니. 나는 지금 40이 훌쩍 넘었으니 생산적이지 않으면 나락이라는 얘기군. 어쩌면 그 갈림길에서 당연한 수순의 고민을 하는 거란 말이지. 에릭슨이 제시하는 심리·사회적 발달단계는 모두 8단계로 나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남아 있는 그 한 단계가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그 마지막 답안은 다음과 같다.
8단계 자아 통합 대 절망감
인생의 황혼기.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조망하며, 자아 통합에 가까워지려는 개인의 노력이 동반된다. 이때, 통합이란,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가치 있다는 감정에서 나온다. 만약 이 시기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저 문장 속에서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를 생각해 본다. 자아 통합이 안 된 것? 과거와 현재에 회한이 그득한 것? 알 수 없는 미래의 통증? 아니면 죽음 그 자체?
아니다. 다 아니다. 정작 내가 두려운 것은, 얼마나 내가 이 세상에서 누렸는가를 끝내 이해 못 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중년에 성큼 들어섰음에도 내 안에는 내가 많아 혼란스럽다. 아직 덜 자란 소녀도 있고, 진짜 괴물 같은 아줌마도 있고, 베테랑 능력자도 떡하니 혼재해 있다. 종종 서럽거나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올 때, 내 안의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를 파고들면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중년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풀 준비가 덜 된 중년.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가 생각하는 중년은 이렇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해지는 시기. 일상다반사에 진심으로 담대해지는 시기. 말하자면, 저 복도 끝에서 두 남학생이 멱살 잡고 큰소리를 질러 전교생이 몰려들어도 차분하게 다가가 진정시킬 줄 알고, 회의 석상에서 억울한 마음을 참지 못해 큰소리친 동료에게 ‘그 감정이 진짜였으니 후회할 필요 없다.’ 조언하는 것. 크게 부부 싸움한 이후, 엄마는 아빠를 정말 사랑하느냐는 아이들 말에 ‘너무 부끄럽지만, 이 모습도 사랑의 일부인 것 같다’ 말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리고, 엄마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 잠깐만 혼자 있게 해 달라며 담담하게 집을 나설 줄 아는 나이.
나는 중년이 맞다. 저 8단계의 경지에 어떻게 이를 수 있을지 까마득하지만, 일단 7단계를 격렬하게 맞이한 중년이라는 사실부터 기꺼이 인정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