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과 쉰여섯의 공통점 - 독립의 길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16
홍산 시내
좀 더 다양하고 마트에서 팔지 않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홍산 시내에 나가야 한다. 홍산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타고 가는 게 좋다. 부여집 근처에 버스는 하루에 두 번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보통 자전거를 타고 간다. 홍산에서는 5일마다 시장이 열리고 각종 병원과 2개의 마트도 있다. 큰 외삼촌은 홍산에서 모종을 사 와 밭에 심는다. 큰 외삼촌이 좋아하는 막걸리도 홍산에 있는 마트에서 팔기 때문에 큰 외삼촌 내외는 오실 때 이곳을 들린다.
엄마의 필수인 성당도 홍산에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면서 한동안 성당에 가지 못했지만, 원래는 일요일에 꼭 성당에 갔었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있을 때,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성당에 갔다. 일을 하지 않아서 평일에 시간이 생긴 이유도 있었지만, 엄마는 엄마의 병을 하느님의 뜻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엄마의 암을 발견하게 된 병원의 이름에도 ‘성모’가 들어갔다.
엄마는 건강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 경고를 주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날 기회로도 여겼다. 현상의 원인을 종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아프면 내 생활습관과 스트레스의 원인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성당에 나갔었는데, 언니는 옷을 사준다는 엄마의 꼬임에 넘어가 세례를 받았다. 나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며 엄마의 회유를 거절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 나는 엄마가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궁금했다. 엄마의 간호를 하며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있었던 나지만, 종교인이 아닌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이 있었다. 가령 자신의 병을 하느님이 주신 암시 또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나는 엄마를 더 알고 싶어서 성당에 예비자 교리를 들으러 다녔다. 그러나 엄마와의 차이만 확인하고 결국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엄마는 내가 성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하느님이 이끌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예비자 교육을 마치 희망을 본 것처럼 받아들였다. 내 생각에 그것은 나의 의지라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말을 들으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당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의 신과 나의 신은 이미지가 아주 달랐다. 내가 생각하는 신은 창조자이지만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는 않는 존재였다. 엄마의 신은 좀 더 적극적인 분이었다.
엄마는 믿으라고 하면 그대로 믿는 것이 쉬운 사람이었지만, 나는 “왜?”라는 질문과 의심을 계속하는 사람이었다. 또 나는 내가 믿을 신이 절대 선이어야 한다는 이상이 있었다. 내 이성과 모순되는 것을 넘어가기 힘들었다. 특히 하느님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는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믿지 않고 착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종교를 가지고 싶고, 그것이 엄마와 같은 종교라면 좋겠지만 아직 나는 공부도 이해도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믿더라도 제대로 알고 믿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세례를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에 슬퍼했고 다시 생각해달라고 울기도 했다. 엄마는 자신이 아팠기 때문에 내 종교문제에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조급했다. 엄마가 없을 때 종교가 엄마의 대신이 되어주길 바랬다. 세례는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또 엄마가 힘든 시기에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과 달리, 나는 아프게 종교를 접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내가 엄마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내가 엄마의 생각만큼 신을 찾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는 내 친구들과 언니의 말도 엄마의 설득하는데 역할을 했다. 엄마는 내가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도 남이 이해시킬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교육했던 수녀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나에게 종교는 엄마의 대신이 될 수도 없었고, 엄마가 선물해줄 수도 없는 성질이었다. 대신 엄마가 집들이 선물이라고 준 성수 정도는 냉장고 위에 고이 모셔 놨다. 엄마는 나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자유롭게 키웠던 것일까. 엄마는 언제나 나를 이기지 못했다.
독립할 수 있을까?
엄마는 겨울이 오면 홍산에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이다. 그래서 언니 차를 부여에 가져갈 것인지 고민 중이지만, 매일 결론이 달라진다. 어느 날은 차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은 차는 있어야겠다고 말한다. 아빠와 큰 외삼촌 내외가 매주 부여집에 가기 때문에 차가 필요한 일은 그들이 오는 주말에 몰아서 한다. 하지만 남에게서 의지하지 않기 위해 부여로 내려간 엄마로서는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엄마는 아직 암환자이고, 두 달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 그럴 때는 아빠가 엄마를 데려오고 데려다준다. 부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이다. 아니면 돈이 필요하거나. 부여터미널로 나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두 번 오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콜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야 한다. 엄마가 좋아하는 아울렛에 가서 쇼핑을 하기 위해서도 차가 없이는 어렵다.
엄마는 내가 부여에 내려갔을 때에도 어김없이 나와 쇼핑을 하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나에게 이 옷 저 옷을 입혀보며 인형놀이하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는 입으라고 해도 입지 않지만, 나는 대부분 입어준다. 하지만 부여아울렛까지는 택시를 타고 가면 2만 원이나 나왔다.
엄마는 독립을 목표로 부여에 내려갔지만, 백수인 엄마가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 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아니 세계 어디를 가도 힘든 일이다. 엄마가 암환자가 아니고, 여자가 아니고,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성이라면 가능할까? 나는 부정적이다. 맥가이버여도 자급자족은 불가능일 것이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있고, 언니와 내가 있다. 또 형제들과 민수네 같은 이웃도 있다. 엄마의 보험료, 병원비, 집 대출금, 부여집의 관리비 등은 차치하더라도 부여에서 살면서도 소소한 용돈은 필요하다. 방앗간에서 떡도 만들어야 하고, 쌀도 사야 하고, 가끔 시내도 나가야 하며 성당에 헌금도 내야 한다. 한 달에 5만 원도 되지 않는 돈이지만, 엄마에게는 이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나와 언니는 독립을 하면서 엄마에게 돈을 빌렸다. 그래서 매달 엄마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 사회 초년생인 우리가 독립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뿐이다. 대출을 받아도 전세금의 20%는 자본이 있어야 한다. 부모님께 돈을 빌려서 하는 독립을 독립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로 인해 용돈으로 가장한 이자를 주고 있으니 엄마의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자취생이라고 칭한다. 자취랑 독립은 나에게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자취를 했다. 보증금은 당연히 ‘엄마가’, 월세와 용돈은 당연히 ‘엄마가’였다. 대학원에 다닐 때에도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한 달에 50만 원 받는 대학원생이 자립하기란 어려웠다. 엄마는 매달 50만 원씩 용돈을 보내줬다. 나는 나이만 먹고 엄마에게 빌붙어 사는 빈대같이 느껴졌다. 학생이란 지위도 나에게 온전한 핑계가 되어주지 못했다. 자취는 하지만 독립은 못한 상태였다.
약 5년간의 자취생활 동안 계약기간에 따라 짧으면 1년, 길면 2년마다 이사를 했다. 나는 언니에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지 않냐”는 말을 했다. 물론 성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는 거지만 말이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 다녀야 하는. 그게 내 현실이었다. 현실은 팍팍하지만 동화처럼 모험 중이라고 나 나름대로 포장했던 것 같다. 그래야 내일이 더 기대되고 신나니까.
서른이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
돈을 벌고 직장인이 된 지 5개월 만에 이사를 했다. 대출을 받기 위해 여러 은행에 상담 다니고, 부동산에 대출 가능한 매물인지 물어보고, 차용증 쓰는 법과 이사 용달을 알아봤다. 엄마 없이 이사하는 것도,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 것도 처음이었다.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데는 힘듦을 넘어 서러움까지 느꼈다. 대출을 받는 것은 꽤나 까다롭고,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일이다.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처럼 거짓이나 과장을 섞을 수도 없다. 숫자와 증명서로만 입증된다. 급여명세서를 제출할 때는 저절로 움츠려 드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내 대출 한도의 끝까지 대출을 받아도 엄마에게 돈을 빌려야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내가 완전한 독립을 위해 대출을 받으러 다닐 때, 어른 같다고 말했다. 독립을 해야 어른이 되는 느낌이다. 나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
원래 어른이 된다는 건 힘든 거야.
사랑니로 고생할 때 아빠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지만, 아빠의 말이 맞다. 어른은 외롭고, 피곤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다. 힘들다 보면 언젠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낄 날이 올까. 서른이 된 지금도 어른은 참 힘든 것 같다는 생각만 들고,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취업을 한 이후에 엄마에게 빌붙어있던 내 보험과 통신료도 가져왔다. 외할아버지에 이어 엄마까지 암에 걸리자, 엄마는 언니와 내가 암에 걸릴 확률을 높게 점쳤다. 엄마는 내가 암 진단금을 많이 받기를 원했다. 엄마의 암 발견 이후 보험료는 내가 줄일 수 없는 고정 지출이 되었다. 내가 언젠가 암에 걸릴 거라는 걸 예상하고 돈을 낸다니, 참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어른은 나쁜 미래를 준비하는 일들을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엄마에게 빌린 돈은 이자도 내고 차용증도 썼으니까 독립했다고 치고. 내 월급으로 내가 보험도 들고, 적금도 들고, 주식도 해보고 하는데 왜 어른이라는 생각이 안 들까? 냉장고에는 엄마가 준 열무김치, 개떡, 취나물, 고춧가루 등이 채워져 있다. 빨래하다가 얼룩이 안 빠질 때도, 몸이 안 좋을 때도, 벌레가 나올 때도, 엄마한테 전화를 하는데. 이것을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립을 할 수는 있을까.
엄마는 아팠을 때 유일하게 우리 일로 걱정한 것이 우리가 미래에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엄마와 요양병원에서 같은 방을 썼던 아줌마는 딸이 아이를 낳았다. 아줌마는 딸이 아이 낳는 것을 보지 못했고, 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했다. 엄마는 자기 일처럼 안쓰러워했다. 엄마는 언니를 낳다가 기절했다. 엄마의 체력을 닮은 언니와 나도 엄마처럼 힘들까 봐 걱정하고 가슴 아파한다.
엄마는 우리가 아이를 낳고 키울 때 엄마가 도와줄 수 없을까 봐 걱정하다가도 도와달라고 할까 봐 걱정한다. 아이를 키워봐서 얼마나 힘든지 알고 도와주고 싶지만, 주변에서 손주를 돌보느라 고생하는 친구들은 보면 생각이 달라지나 보다. 나도 엄마가 없이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다.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엄마는 건강히 오래 살아야 한다.
나는 엄마한테 독립하지도, 어른이 되지도 못한 것 같다. 아마도 계속.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엄마는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자식은 커서도 아이라더니 나는 끊임없이 엄마에게 매달린다. 사회생활의 힘든 일도 엄마에게 털어놓아야 안정을 찾는다. 내가 독립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엄마와 나는 둘 다 독립을 목표로 살고 있지만, 그건 꿈같은 일이다. 혼자서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서른이나 쉰여섯이나 여전히 장래희망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