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태풍의 나날 - 장마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17
역대 최장의 장마
장마가 길었다. 무려 54일이나 지속되었다. 8월 말에야 장마가 끝났다. 곳곳에서 홍수가 나고 내가 있는 서울도 그랬다. 처음으로 지각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늦게 왔다. 몇 번 반복되니, 지각이 다가와도 다른 사람들도 다 늦겠지 했다. 신발이 다 젖고 가끔 머리도 젖어서 회사에 도착했다. 이런 날은 집에 좀 있고 싶다. 보송보송한 이불에 누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빗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자고 싶다.
비 오는 시골에서는 그다지 할 일이 없다. 밭에 빗물이 고이지 않게 물길을 적당히 내주고는 집 안에서 바깥을 구경하면 된다. 비 오는 소리를 듣다가 출출해지면 주방에 있는 재료들을 취향껏 넣고 전을 부쳐 먹으면 된다. 엄마는 여름에 딴 호박과 고추를 애용했다. 장마가 길었다는 건, 엄마가 부쳐 먹은 전도 많다는 것이다.
지루하다면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 잠시 산책을 나가거나 밭을 들여다봐도 좋다. 작물들이 비를 잘 먹고 있는지, 너무 많은 비로 잠기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꽤 재미가 있다. 부여의 작은 밭은 다행히 비 피해가 거의 없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작물들은 놀랄 정도로 쑥쑥 자라 있다. 그러니 비가 내릴 때 조금 심심해도 잘 충전하고 있어야 한다. 비가 그친 후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왜 낫지 않는 걸까
엄마는 장마를 다 지내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8월 2일. 엄마의 생일이자 귀경일이었다. 7월 말, 두 달에 한번 받던 정기검진에서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엄마의 검진을 한 달에 한 번으로 조정했다. 엄마의 간수치도 빈혈 수치도 정상이 아니었다. 엄마는 피곤해했다. 한두 시간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쳐했다. 엄마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부여에 내려가서도 바빴다. 엄마를 찾는 사람은 많다. 엄마가 친절하고 다 잘하기 때문도 있다. 특히 거절을 못하기 때문일지도.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높게 나왔는데도 엄마는 자신의 힘에 부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검진 때 서울에 올라와서는 반찬 투정하는 아빠에게 시달렸다. 아빠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엄마한테 말을 걸었다. 엄마가 반갑고 심심하고, 대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엄마에게 물어보곤 한다. 불면증이 있는 엄마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큰 외삼촌은 허리 수술을 해서 입원해 있는데 부여의 상추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부여에 내려가자마자 부랴부랴 상추를 따서 보냈다.
부여에 도착해서는 외할머니와 함께 사는 큰 이모가 SOS를 보냈다. 혼자서는 힘이 드니, 외할머니를 며칠만 같이 봐달라고. 엄마는 부모를 모시는 이모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빚이 없어도 어차피 도와줄 엄마지만.
엄마는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다녔다. 아무도 엄마가 아직 아프다는 것을 몰랐다. 엄마에게 괜찮지 않다는 말을 듣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몸은 아무도 듣지 않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가 원하는 건 부여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것이지만, 언제 평화로워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엄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고, 나는 첫 번째가 아니었다. 내가 엄마의 첫 번째 딸이지도 않았다. 엄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우선이었고, 나는 항상 순위가 밀렸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나를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종 서운해도 애정결핍은 걸리지는 않았다. 엄마는 나를 제일 미더워하기 때문에 나를 마지막에 챙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도움이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엄마를 잠시 양보하는 건 내 일상이다. 그리고 엄마의 일상은 자신을 양보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플 때만이라도 엄마가 자신을 양보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착한 아이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고 언니는, 못된 딸들은 엄마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게 된다. 팥쥐처럼 콩쥐 엄마를 구박했다. 그것 보라고. 엄마가 쉬지 않아서 엄마가 아픈 거라고. 몸을 생각하라고. 자신을 생각하라고. 조금만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달라고.
가지 마, 엄마
엄마가 두 달 만에 서울에 올라오고 언니와 나는 엄마의 상태를 알았다. 부여에서는 생기 있어 보여서 그랬는지, 바쁘게 돌아다닐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전화로는 괜찮다고만 하던 엄마였다. 엄마는 괜찮지가 않았다. 얼굴은 노랗게 떴고 살은 찔 생각을 안 했다. 계속 빠지기만 했다. 잠시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집중을 못했다. 팔이 아파서 다른 팔로 한쪽 팔을 들고 있을 때가 많았다. 밭일 좀 쉬엄쉬엄하라고 해도 “나 요즘 하고 싶은 것만 해. 힘든 건 안 해.”라고 말하던 엄마였다. 하고 싶은 게 꼭 건강한 것은 아니라는 걸 엄마는 몰랐다.
엄마는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일은 쉬지 않고 왕창하고, 밥은 과일 몇 개, 야채주스, 부침개나 부쳐 먹고 때울 때도 있었다. 정신 건강에 좋을지는 모르나, 몸에는 확실히 안 좋은데. 아무도 엄마가 그렇게 산다는 걸 감시할 수 없었다. 엄마는 회복도 치료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간과했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게 말렸다. 힘든 척도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엄마가 필요하다고 투정 부렸다. 우리는 지금 장마 중이야. 엄마가 지켜봐 줘. 지켜보는 것만 해줘. 마음 약한 엄마는 일찍 독립시킨 딸내미들, 아빠한테 집중하느라 챙겨주지 못한 내 새끼들에게 미안해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엄마를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미끼를 던졌다. 엄마의 여리고 착한 마음을 이용했다.
실제로 서른이 된 우리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나는 회사에 적응하지 못했고, 언니는 이직을 준비했다. 20대 때보다 더 자주 만났고, 더 자주 전화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지’ 물으면, 언니는 ‘내가 더 힘들어’ 또는 ‘원래 다들 힘들어’라고 대답했다. 장마는 나한테만 오는 건 아닌가 보다. 남들도 힘들다는 걸 알아도 덜 힘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힘듦은 어째 점점 쌓이는 것 같다. 서른도 이렇게 힘든데, 쉰여섯이나 먹은 엄마는 얼마나 힘이 들까.
엄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속상해했다. 자책도 했다. 잔소리의 효과인지 몸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가장 아픈 곳은 손목과 팔이라고 했다. 밭일이 항암으로 약해져 있는 엄마의 뼈에 무리를 준 탓이다. 엄마는 자기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엄마가 그랬다.
언니는 엄마를 한의원에 데려갔고, 손을 쓰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침이나 약보다도 손을 안 써야 나을 것이라고. 활동량이 많으면 간수치가 높을 수 있으니 충분히 쉬어줘야 한다는 주치의에 말이랑 같은 맥락이었다. 엄마는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엄마한테 딱 5년만, 완치 판정이 나올 때까지만 수험생의 마음으로 살자고 말했다. 몸만 생각하고 식단 조절, 운동과 치료를 계획적으로 하자고. 결과가 안 좋더라도 후회 없이 노력해보자고. 마음 편한 일보다 몸 편한 일을 먼저 생각하자고.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며칠을 망설이더니 서울에 올라오라는 우리의 말도 들었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살지는 않겠다고 했다.
부여의 옆집인 양철담집 아주머니는 몇 해 전 (뇌출혈)로 크게 앓아누우셨다.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났다고 말하셨다. 아프니 잘 지내던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엄마 말에 양철담집 아저씨는 착하디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시키는 건 모든지 하고, 아주머니가 아프고 나서는 더 잘해주신다고.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혼자가 되고 싶었다. 혼자 살고 싶었다고 한다. 부여에 혼자 내려와 있는 엄마가 부럽다고. 사람이 싫고, 신경 쓰기 싫고, 눈치 보기 싫은 것이다. 그런데도 같이 있으면 나보다 가족들을 챙기는 나 자신이 싫은 거고.
엄마는 양철담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해주면서 아줌마들은 원래 그렇다고 말했다. 암에 걸렸던 엄마의 지인,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만난 아줌마들은 대부분 혼자 살고 싶어 했다. 아프면 더 혼자이고 싶어 했다. 혼자였던 적이 언제였는지, 있기는 했는지. 엄마는 아줌마의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삶. 그래서 죽을병에 걸렸을 때 드는 생각은 억울함이란다. 자기 삶에 자신이 없었기에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도망가고 싶었다. 아빠를 만난 이후부터 평생 아빠를 사랑했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에게 기대지 못했다. 엄마는 아빠를 마치 아기처럼 생각한다. 혼자서는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 자매가 어렸을 적에도 우리보다 아빠를 더 챙겼다. 물론 나도 아빠가 혼자서 잘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건 엄마와 너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서이다. 나는 엄마가 없으면 아빠도 혼자 살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도 생존 능력이 생길 거라고.
하지만 요즘 들어 내 예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아프고, 아빠는 엄마보다 살이 더 빠졌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서 엄마를 계속 걱정시켰다. 아빠는 빨래를 할 줄 모르면 세탁기 사용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와서 빨래를 해줄 때까지 양말을 100켤레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아무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다.
엄마는 언니와 같이 살기로 했다. 언니 집이 내 집보다 조금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다 원룸이기에 불편하면 두 딸 집을 왔다 갔다 하기로 했다. 언니와 내 집은 공원을 사이에 두고 15분 거리여서 엄마가 산책하기도 좋았다. 엄마는 그 공원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사람이 많지 않고, 언덕과 산이 있어서 운동하기가 좋다고 했다. 엄마가 좋아하지 않는 건 드물지만 그 공원은 다른 공원에 비해 더 좋다고 몇 번이고 자랑했다.
간단한 운동을 하고 싶다며 주민센터에 고전무용 수업도 등록했다. 엄마는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건강을 잘 챙기고 딸들도 잘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건강을 챙기면서 남도 돌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자신을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엄마가 제일 못하는 일이었다. 우리들의 잔소리는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와 같이 사는 건 좋았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