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 - 부여와 서울

서른에 만난 엄마의 텃밭 19

by 소라

다시 부여로


태풍이 끝나고 엄마는 부여로 돌아갔다. 한 달을 넘게 서울에 머물렀다. 그새 계절은 가을로 바뀌었다. 엄마는 곧 돌아온다고 했다. 부여로 가는 것은 정리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둘 늘어 간 살림살이와 옷을 챙기고, 밭도 좀 살펴보고, 동네 아주머니들께도 인사를 한다고 했다. 정리를 위해 가는 사람 치고는 어느 정도 신이 나 있는 티가 났다.

엄마는 부여에서 오래 살 생각으로 지역화폐를 100만 원가량 구입해 놨다. 부여에서만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시골에서 돈을 쓸 데는 많지 않지만, 포인트를 더 준다는 말에 질러버렸다. 엄마는 할인과 포인트에 약했다. 이번에 부여에 내려가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데리고 부소산성 인근에서 지역화폐로 밥도 사 먹고 궁남지의 카페에서 시간도 보냈다.

봄에 뜯은 쑥은 아직도 냉동실에 두 봉다리가 남아있었다. 엄마는 그 쑥을 방앗간에 가져가서 모두 쑥 가래떡으로 만들어왔다. 올해 봄의 잔여였다. 부여에서의 몇 달은 엄마에게 힘이 되는 기억이었다. 내가 힘이 들 때 엄마 아빠와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이, 엄마가 두고두고 꺼내볼 추억이었다.



현재의 엄마, 미래의 딸


엄마는 내려가서 또 열무김치를 담갔다. 엄마가 올해 열무김치를 몇 번이나 담그는지 모르겠다. 곧 김장철이 다가와서 큰 외삼촌과 파, 무, 배추 등을 심었다. 배추는 씨를 뿌리지 않고,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이것들이 다 자라면 큰 외삼촌이 내려와서 김장을 한다고 했다. 가을을 위해 준비했던 팥도 수확했다.

엄마가 가장 기대했던 콩은 서리태콩이기 때문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나 수확할 수 있었다. 엄마가 서울에 올라와서 들으니,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이 함께 땄다고 했다. 반은 벌레가 먹었고 나머지 반은 씻어서 콩밥을 해 먹었다고 했다. 엄마의 두유 계획은 무산되었다.

엄마의 손은 아직도 낫지 않았지만, 엄마는 당장 앞에 있는 작물들이 더 중요했다. 몸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미래를 생각하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엄마와 살 때는 그런 점이 잘 맞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에게 나는 유독 잔소리가 많은 딸이었다. 오늘만 사는 부모님과 내일을 걱정하는 딸은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용돈을 받으면 비상금부터 빼두는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한 달의 생활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사시는 분들이었다. 한 달에 몇 번 외식을 하고, 여행을 가는지도 몰랐다. 여행은 계획이 없이 떠나야 제 맛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숙소와 식당, 관광지까지 고르고 가는 나와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엄마에게 돈을 너무 많이 써서 걱정이라고 말하면, 신용카드 할부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천주교를 믿게 되기 전에는 사주나 신점을 꽤나 좋아했었다. 그때 갔던 점집에서 나는 땅이고 엄마와 아빠, 언니는 불이라고 했단다. 나는 가족들을 받치고 가족들은 활활 타오른다고. 엄마는 그 무당이 용하다고 했다. 내가 중심을 잡아주어 가정이 유지된다는 걸 자주 느낀다고 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가족들은 불안정하고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반짝이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용기 없고, 겁 많은 나는 활활 타오는 것이 무서워 바닥에 납작 붙어있는 게 아닐까. 나는 평생 범생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편은 아니었다. 적당히 사는 편이었다. 한 번쯤 타올랐던 적이 있었던가. 공부도, 일도, 일탈도, 사랑도 언제나 뜨거웠던 적은 내 기억에 없다. 이렇다 할 재능도, 이것저것 걱정만 하며 실행할 용기도 없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사람이나, 못하고 사는 사람이나 결국 후회를 하는 건 똑같았다.


엄마는 부여에서 살다가 온 후로 부쩍 교외에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언니와 나는 둘 다 엄마의 소원을 공감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독히 서울 아이들이었다. 작은 텃밭을 꾸리고, 화단에 꽃을 심고 물을 주고, 한 달에 한번 잔디를 깎는 일을 우리는 귀찮은 것으로 생각했다. 엄마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니와 나의 취향은 같지만, 반응은 달랐다. 언니는 “하고 싶은 건 지금 해야 해. 나중에는 할 수 없을지도 몰라.”라고 말하고, 나는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며 말렸다. 교외는 투자가치도 낮으며, 집을 관리하는 것도 힘에 부치고 교외가 생활편의 시설이 부족해서 불편할 거라고.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못하는 것을 엄마도 못하게 하는 심보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다는데 이것저것 안 되는 이유만 말하는 딸이라니. 엄마는 꽤나 속상했을 것이다. 엄마는 현재를 열심히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뿐인데 말이다. 지금 나는 엄마의 부여처럼 힘이 되어주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엄마 아빠가 만들어준 추억만을 무기로 간직하면서.




엄마의 미련


엄마의 짧은 부여 방문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엄마는 정리를 위해서 간 것이라고 했지만, 애초에 맺고 끊음이 명확하지 않은 엄마였다. 엄마가 부여로 가져간 물건 중에 되돌아온 것은 별로 없었다. 겨울에 입으려고 가져간 패딩도, 봄에 입었던 가디건도, 밭에서 쓰려고 나에게 빌려간 챙 넓은 모자도, 언니와 내가 어버이날 선물로 보내준 족욕기도, 읽으려고 가져간 책들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그거 어디 있어?”라고 물으면 “부여집에 갖다 놨지.”라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거기서 구매한 물건들도 대부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엄마는 언젠가 그것들을 부여에서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미련을 부여집에 뚝뚝 흘리고 왔다.

반면에 엄마가 가지고 온 작물들은 꽤 많았다. 팥과 늙은 호박, 취나물, 열무김치, 옥수수, 감 등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중에서도 팥의 양은 꽤 많았는지 엄마는 팥을 넣고 호박죽을 쑤어먹었고, 몇 번이나 팥밥을 해 먹었다. 서울에 엄마를 묶어둔 우리를 향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엄마의 시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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