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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 Apr 11. 2022

적응하는 중

서른 하나에 만난 할머니의 옛집 17

 이사 오고 내 삶이 변한 점이 있다면, 내가 조금은 활동적이 됐다는 것이다. 회사 다니는 일이 일상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퇴근하고 한두 시간과 주말은 조금 변했다. 내 생활에 몇 % 되지 않는 시간의 변화가 생각보다 내 삶 전체에 꽤 묵직하게 스며든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사한 뒤 새로 시도한 일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처음이자 오랜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브이로그를 촬영하는 일이다. 내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기록하고 싶어 져서 촬영을 시작했다. 원래 촬영에는 소질이 없어서 사진도 잘 찍지 않는 나인데, 이사하고 나서는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내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게 되면서 내가 하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걸 하면 이렇게 재미있을 것 같다.', '요즘 계절에 먹어야 하는 음식이 뭐가 있지?', '나 이번 주도 잘 지냈구나.' 할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은 평범한 일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또 영상을 다시 보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구나,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브이로그 촬영의 단점은 오히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계속 촬영 소재를 찾고, 스토리를 구상하다 보니 내 삶과 좀 다르게 살게 될 가능성도 있다. 평소였다면 일회용 접시에 먹을 음식을 그릇에 옮겨먹는다던가, 편히 쉬고 싶은데 요리를 한다던가 하는 일이 있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촬영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사하고 해먹은 요리 : 배추전/들깨수제비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데에서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너무 과하다면 내 삶을 기록하겠다는 원래의 취지와 멀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 일상을 지키며 기록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 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말이다.


 이사 오고 나서 또 빠진 것이 있다면 시장과 카페이다. 망원동 골목은 망리단길이라고 불릴 정도로 맛있고 예쁜 것들이 많다. 확실히 20대 젊은 연령대에서 많이 오는 것 같다. 망리단길 옆에 시장은 망리단길과는 다른 느낌의 생동감을 준다. 내가 어릴 때도 시장은 북적였었는데 여전히 사람이 많다.

 망원동은 놀러 온 사람들도 많지만 신기하게 동네 주민들도 아주 많다. 시장과 그 주변은 걸어 다니는 길이 막힐 정도로 사람이 많다. 어릴 적에도 시장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회사는 거의 없고 대부분 주택가이기 때문일까?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없는데 길거리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정말 안 좋아하는 집순이인데 이사 오고 나서는 여기저기 탐험하러 매일 나가고 있다. 주말에는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기도 한다. 시장에는 어떤 새로운 식재료가 들어왔는지 보면서 계절이 바뀌는 걸 체감한다. 나는 제철 식재료의 변화로 계절을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주말에 늦게까지 자는 걸 좋아해서 어쩔 때는 해가 지고 나서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사 와서는 오전에 잠이 깨버린다. 처음에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안방의 햇빛이 잘 들어서 영향을 받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예전 집도 해는 잘 들었기 때문에 해를 원인으로 꼽기에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일찍 깨는 걸 수도 있겠다.

 주말에 일어나면 집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고 망리단길과 시장을 구경하며 카페에 들러 디저트 쇼핑을 한다. 커피를 잘 못 마셔서 카페에 자발적으로 거의 가지 않는데, 이사 와서는 수많은 카페들의 유혹에 제대로 빠지고 말았다.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집이면 커피를 마셔도 좋고, 디저트가 맛있는 집이면 포장해와서 우유랑 먹는다.

카페

 지도 어플에 저장해 놓은 카페만 20개가 넘는다. 그보다 훨씬 많은 카페들이 좁은 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다 특색이 다르고 나름 유명한 곳들이다. 내가 저장해 놓은 카페들을 하나씩 도장깨기 하는 맛에 주말마다 집에 붙어있지 못한다. 집도 꾸며야 하고 집 밖을 탐험도 해야 되고 요즘은 너무 바쁘다. 회사만 안 가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마음가짐이 달라져서 그런가 기존에 하던 것들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처음 이사 와서는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도 새로운 시도 같고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탁기를 써보는 것도, 로봇 청소기에게 청소를 시키는 것도, 새로 산 먼지떨이를 쓰는 일도 다 재미 었다. 지금은 어느새 다시 집안일이 슬슬 귀찮아지고 있지만 집이 점점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그런가 예전보다 더 부지런을 떨고 있다.

 퇴근 후에 집에 있는 시간은 시간으로 따지만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내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하고 싶은 게 많아졌고, 재미있는 게 생겼다. 정말 작은 변화인데 내 일상의 분위기가 확 다르게 느껴진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 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집 사진

 이사하면서 버릴 옷들도 아직 다 못 버렸고, 집에서 맘에 안 드는 부분을 고치는 일도 아직은 요원하다. 집 근처 탐험도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는 집에 익숙해지고 집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렸다. 나는 아직 우리 집에 적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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