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장님, 제가 왜 하위고과를 받아야 하나요
대기업에서 두 번째 임신이란
얼떨결에 둘째를 임신하고 나서, 모성보호를 HR에 등록하기 위해 그룹장님께 말을 해야 하는데, 두렵고 떨린다. 첫째 임심했을 때에도 같은 그룹장님이었고 그 사이 임신한 직원들이 많이 생겨서 휴직의 공백이 많았다. 그래서 팀 분위기가 임신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걱정된 파트장님이 대신 미리 말씀을 드렸고, 다음 날 내가 찾아갔을 때는.. 좌절스러웠다. 그분께 생각할 시간을 드린 게 화근이었다. 생각할 시간 없이 바로 맞대응했어야 오히려 짧게 끝났을 일이다. 생각할 시간을 하루나 줬으니, 잔뜩 준비해 온 그를 나야말로 생각 없이 맞닥뜨려서 듣지도 않아도 될 말들을 듣고 또 들었다.
분명, 한 달 전에 첫째 육아 휴직 후 복직하여 적응을 완벽히 잘했다며 칭찬과 함께 즐거운 티타임을 가졌다. "진급은 언제이니?" "올해 마지막 연차입니다." 대화를 오가며 "맡은 일이 많은 것 알고 있다, 잘해줘서 아주 좋다." 격려를 두둑이 받았다. 그런데 한 달 만에 상황은 정반대로 역전되었다. 그 계기는 두 번째 임신이라는 사실로. 한 순간에 나는 생각 없이 살아서 둘째를 임신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똑똑하지 못하고 계획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일 억울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라고 해서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진급이, 회사 생활이, 나의 커리어가 아쉽지 않겠는가. 아쉬움을 넘어서 안타깝고 원통스러운 부분도 있다. 과연 애 둘을 낳고 키우며 복직은 할 수 있을까 앞이 깜깜한 상황이다. 그만두면 어쩌나,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으로 안 그래도 인생이 서러운 상황이다. 나 자신도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말들을 상사에게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나약한 여자처럼 보이게 울지 말자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일부러 팀장님 앞자리를 피해 줬던 선배의 손에 붙들려 나오면서, 복직 후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긴 시간을 참아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이 서러웠다.
다음 날 산부인과를 갔고, 자궁에 출혈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출근을 하면 안 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내 몸에 새로 들어온 생명체와 적응하느라 입덧이 심했고, 그 와중에 세상 밖 나의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함께 의지할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었고, 도저히 몸 상태가 좋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병가를 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임산부가 못 들을 말을 다 들은 직후 바로 다음날이었다.
2주 병가를 냈고, 상황이 호전되지 않아 2주 병가를 추가적으로 내서 한 달을 집에서 요양했다. 그 사이 남편이 돌아왔고 육아를 함께할 수 있어 큰 힘이 되었다. 당연한 현실이 무척 고마웠다. 어렵게 4주 만에 회사를 가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반기 고과 결과표에 적힌 하위 고과였다. "이게 뭐지? 이게 뭘까?" 고과 책임자인 파트장님께 문의드리니 그룹장님과 면담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건 또 뭘까?"
누가 봐도 뻔한 상황들, 예상되는 말들 속에 한 달 병가를 내서 그렇다는 답변을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홀몸도 아니고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 겨우 다시 출근을 했는데, 나를 기다린 것이 고작 이런 것인가. 명확하게 따져봤을 때 상반기 고과 기간에 병가를 내지 않았다. 그 이후에 병가를 냈고, 엄밀히 말해서 상반기 고과 기간 동안은 회사에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인정과 격려를 받았던 바로 그 시기에 하위고과라니, 임신을 했을 뿐인데 세상 억울한 일이 많아진다.
대기업에서 첫 번째 임신은 축하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임신은, 일 잘한다고 칭찬하던 직원에게 주는 하위고과 같은 일이다. 여자가 다니기 좋은 회사라고, 치부하던 그 대기업에서조차 일어나고 있는 일들. 직원이 사람이 아니라 부속품이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현실에 모골이 송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