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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Sep 10. 2018

055. 우리도 '나쁜 피'를 지닌 것 아닐까.

대학로 소극장 연극 <나쁜 피> 후기

  <나쁜 피>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연극이다. 하지만 이 문장으로는 한 없이 부족하다. <나쁜 피>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짚는 걸 넘어, 사회에 함몰된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까지 담는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일가족 살인범 태영(김중엽 분)과 그를 상담하는 상담자 수현(문병설 분)의 대화로 진행되는 연극 <나쁜 피>는 여타 사회 비판 작품이 흔히 빠지는 자가당착의 모순을 훌륭하게 극복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점의 극복을 서사의 동력으로 영리하게 활용한다.

  주인공 태영은 한국의 여러 비극에 연루되어 있는 가족이 스스로 느껴야 마땅한 죄책감을 대리하는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깊게 관여했고 삼풍백화점을 지은 장본인이며, 어머니는 씨랜드 청소년 화재사건에서 화재에 죽어가는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술에 취한 채 먼저 탈출한다. 아버지는 이러한 사건을 언급되고 퍼지는 걸 체벌을 통해서 통제한다. 동생은 비극의 전말을 다 파악해도 안타깝지만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태영은 가족이 비극을 대하는 태도에 한 없이 깊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일가족 살인을 통해서 죄책감을 해소한다. 

  극단적인 해결책을 택한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수현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 논리적인 듯 보인다. '당신과 당신 할아버지는 다를 바가 없다.'라고 수현은 태영에게 일갈한다. 하지만 태영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맞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살인이라는 해결책을 택했고, 자기도 죽고 싶어서 자해를 했다고 말한다. 나는 <나쁜 피>의 가장 큰 성취가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대한민국의 크나큰 사회적인 비극을 다루는 공연 혹은 작품에서 사회적인 시스템의 비판 혹은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인간성이라는 두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한다. 전자는 택한 작품은 내게 너무 기능적으로 느껴졌고, 후자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하지만 <나쁜 피>에서 비극의 근원을 '나쁜 피'로 규정하는 순간 이 연극은 끊임없이 확장한다. 기형적인 한국 사회 구조에서 가해자의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한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서, 시스템의 병폐에 대한 이야기, 더 넘어서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 기억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까지 이른다. '나쁜 피'라는 효과적인 소재를 활용하면서, 미시적인 해석과 거시적인 해석 모두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연극 초반에 왜 태영이 수현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전할 매개체로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구심이 들지만 본격적으로 태영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연극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약 75분 동안 대화로만 이어지는 이 연극을 이끄는 건 태영을 연기하는 김중엽 배우의 연기이다. 살인을 하는 과정의 설명하는 장면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순간순간 발산하는 엄청난 에너지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흔하디 흔한 페이드 인-아웃 한 번 없지만 두 배우의 연기, 특히 김중엽 배우의 연기는 극에 빠져들게 만들기 충분하다.

  한국 사회의 병폐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숨 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나쁜 피>는 과거의 사건을 다루었지만 연극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세월호 침몰이다. 씨랜드 청소년 화재사건과 삼풍백화점에서 세월호 침몰사건까지 우리는 얼마나 바뀌었는가. 우리가 비극을 대하는 태도는 태영의 동생과 얼마나 다르지 않은가. 단지 사건으로만 소비하고 잊지는 않았는가. 과연 태영처럼 근원을 끊기 위한 노력을 시도라도 해 보았는가, 태영 같은 존재를 미치광이로 취급하지 않았는가. 연극이 끝나고 더 긴 시간 동안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연극 <나쁜 피>는 9월 16일까지 나온씨어터에서 계속한다. 평일 화수목금 저녁 8시, 토요일 저녁 3시, 7시, 일요일 저녁 4시, 관람을 꼭 권한다. 


다들 많이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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