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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Nov 27. 2018

062. 당신 옆 누군가의 이야기

타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평범한 궤적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궤적을 함께 걸어온 친구의 존재였다. 유치원 때부터 나이 앞자리가 3에 육박할 때까지 연락을 끊지 않고 같은 동네에서 지금까지 모든 일을 함께 해온 친구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은 의외로 굉장히 부러워했다. "나는 이사를 자주 다녀서 어릴 때 사귄 친구들하고 연락이 끊겼어.", 혹은 "유치원 때? 기억도 안나."라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꼭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그러면, 그 친구 하고는 모든지 다 털어놔?" 그들의 똘망똘망한 눈을 떠올려보면, 서로의 삶에 대한 모든 걸 공유하고 함께하는 관계가 오랫동안 이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상상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그럼에도

  "아니."였다.

  그들의 장밋빛 상상을 바다 위 모래성처럼 한 순간에 무너트리는 건 미안했지만 실망할 때의 표정은 그에게 소박한 유희였다. 아주 작은 누군가의 무언가라도 그걸 무너뜨리는 건 너무나 즐거웠다. 아무렇지 않게 '아니'라고 말할 기회가 올 때, 그는 마음속으로 전 세계의 '아니'를 말하는 다른 누구보다 기뻤다. 일단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대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즐거웠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도 그 사람의 체계 중 일부가 무너졌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입가의 미소를 감추기 급급했다. 무너지는 정도가 아주 사소해서 본인이 모를 정도여도 타인의 무너짐은 그에게 새하얀 도화지를 양껏 물감을 묻힌 붓으로 마음껏 더럽히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었다. 새하얀 부분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그는 질리긴커녕 더 힘차게 붓질을 해나갔다.

  점점 도화지 더럽히기에 중독되면서, 그는 더 과감해졌다. 물감과 붓을 사기 위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붓을 구비하면 거침없이 휘둘렀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그는 더 큰 붓과 더 많은 물감을 갈망했다. 마약처럼 점점 그 행동에 심취한 그를 주변에서는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심취해서 계속 붓질을 해대는 그도 주변에 점점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새로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로 남들의 무언가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전에는 거짓말이든 아니든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렸다면, 이제는 오로지 거짓말로 일으켜 세웠다. 하얀 도화지를 더럽히던 그는 이제 더러워진 도화지에 두껍게 하얀 물감을 칠해 감쪽같이 하얗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작업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그에게는 칭찬이 쏟아졌다. '참 배울 점이 많은 친구야'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는 의아했다. 본질적으로 같은 작업인데 반응은 정반대였다. 여러 붓질을 반복해서 시험해도 그는 왜 다른 반응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냥 이유를 따지지 말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오늘도 그는 누군가의 무늬를 흰 색깔로 지우는 중이다.

  그는 오늘도 당신 옆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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