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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May 06. 2020

누나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려고.

누나에게

누나, 어제는 신기한 책을 읽었어요. 제 인생을 그대로 베낀 거 같았어요.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이라는 책인데, 그중 첫 번째로 수록된 동명의 작품 <오직 두 사람>이 바로 제 이야기 같았어요. 저는 그 책을 읽고 누나한테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마치 주인공 현주가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처럼요.


누나의 대학 합격 발표일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누나는 최고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학교가 아닌 낮은 우선순위의 두 학교에 합격했죠. 그 날 차갑게 가라앉은 집 분위기, 기억나요? 저는 그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요. 아빠의 얼굴에 가감 없이 드러나는 실망감과 엄마가 위로하는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다른 종류의 실망감은 당사자가 아닌 저도 숨 막혔어요. 누나의 압박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도 않아요. 아빠는 고함을 쳐가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라고 누나를 다그쳤죠. 당사자도 아닌데 학교에 가서 학과 설명회를 듣고 커리큘럼이 적힌 설명서를 받아오기까지 했어요. 통계학은 전망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는 논리적인 설명과 사람을 기죽게 하는 굵은 목소리의 고함이 섞인 아빠의 말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어요. 게다가 아빠는 통계학 분야의 교재를 내는 출판사에서 일하잖아요. 엄마도 아빠를 말리면서도 아빠의 말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은연중에 드러냈죠.


그런데도 누나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지방에 있는 대학교를 고집했어요. 누나가 선호하는 학과였죠. 아동복지학과. 전문적인 통계학 지식에 지지 않고 말하는 누나의 모습에는 확신이 있어 보였어요. 결국 아빠는 누나가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을 용인했죠.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과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으로요. 근데 누나는 결국 4.0이 넘는 학점으로 한 학기도 쉬지 않고 졸업하고 바로 좋은 어린이집에 취직했잖아요. 대학원은 어린이집에서 일하면서 같이 다닐만해요?


저는 누나의 결단력이 부럽고 그 원천이 뭘까 궁금해요. 그래서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대체 전문적인 지식과 위압적인 고함 두 가지를 모두 견뎌내고 누나만의 선택을 한 원동력이 뭔가요? 사실 저는 누나가 어떻게 말할지 상상이 가요. '네가 생각했을 때 맞는 걸 해' 분명 지나가는 말로 툭 내뱉겠죠. 그런데요 누나, 그게 너무 어려워요.


엄마 아빠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워 하던 대학교 졸업 한 학기를 남겨놓고 있지만 전 아직도 갈피를 못 잡겠어요. 대학교에 들어가 영화라는 꿈을 가지고 영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누나도 알죠? 맨날 새벽 늦게 집에 들어와서 엄마랑 싸우던 거. 제가 새벽에 돌아오면 엄마는 잠도 안 자고 저를 기다렸어요. 다음 날 아침 9시에 나가야 되면서. 그러고는 제가 항상 뭘 했는지 물었죠. 영화 얘기를 했을 때마다 굳어지는 엄마의 표정이 기억나요. 제가 늦게 들어오는 말이 많아지면서 엄마는 제가 있는 데서 아빠를 타박했어요. 당신이 영화를 좋아해서 현서가 헛바람이 든 거다. OCN를 보고 있던 아빠는 멋쩍은 표정으로 TV 채널을 돌렸죠.


동아리에서 선배들 작품 연출부를 몇 번 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저도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두 번 잡았어요.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서 찍었어요. 39도가 넘어가는 날에 야외에서 6시간 넘게 촬영을 했어요. 동아리 친구들이 더워 죽으려고 하는 와중에도 저는 별로 덥지가 않았어요. 연출을 해서 너무 기뻤거든요. 근데 상영회 때 반응이 너무 별로였어요. 가장 친했던 선후배부터 같이 참여한 동기들에게도 반응이 안 좋았어요. 저 자신도 실망스러운 결과물이었어요. 왜 이렇게밖에 각본을 못쓰고 연출을 못했을까.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저는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지원하는 공모전마다 전부 떨어졌어요. 이렇게 시나리오 공모전이 많은 데 제가 쓴 이야기는 하나도 재미가 없나 봐요. 공모전에 떨어질 때마다 엄마가 아빠한테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요. 당신 때문에 애가 헛바람 든 거야... 그 말이 메아리처럼 귀에 맴돌아요. 누나는 생각대로 일이 안 흘러가면 어떻게 했어요? 학점이 잘 안 나왔을 때,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그때 아빠의 충고를 들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서 어떻게 탈출했어요?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제 옆에서 엄마가 속삭이는 것 같아요. 헛바람이 든 거야...


편지가 누나한테 갈 때쯤이면 아마 저는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을 거예요.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요. 누나를 보면 부모님이랑 떨어져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해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를 찍어서 출품해 보려고요. 아무 데도 안되면 그냥 그만두게요. 지금 카페 아르바이트하고 과외도 구했어요. 드디어 한 번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보게요. 엄마 아빠의 따듯한 여유 속에서 벗어나서, 진짜로 한 번 해보려고요. 누나는 이미 대학생 때 홀로 섰는데 저는 나이 스물일곱이 넘어서야 혼자 설 계획을 짜고 있네요. 저 잘할 수 있겠죠?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라는 누나의 말 뜻을 왜 그땐 몰랐을까요? 잘 지내세요. 생일 선물은 카톡 기프티콘으로 보낼게요.


조현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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