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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서 May 19. 2020

엄마의 비빔국수

비 오는 날의 비빔국수 이야기

어릴 적에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항상 비빔국수를 먹었다. 창문에 빗물이 맺히면 엄마는 TV를 보다가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엄마는 무용 동작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냄비에 물을 올리고 냉장고에서 배추김치와 고추장, 들기름, 매실액, 그리고 식초를 꺼냈다. 배추김치를 잘게 송송 썰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았다. 김치를 담은 그릇에 고추장, 매실액, 그리고 들기름을 넣어서 김치를 무쳤다. 김치를 양념하는 게 마무리될 때 즈음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찬장에서 소면을 꺼내서 팔팔 끓는 물에 넣었다. 소면이 잘 익으면 물을 따라 버리고 얼음물 면을 씻어 열기를 날려 보냈다. 소면을 꼭 짜서 양념해놓은 김치에 넣어 무쳤다. 채 썬 오이나 달걀이 집에 있으면 곁들였다. 곁들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와 달큼한 김치 냄새가 집에 퍼졌다. 나, 누나, 그리고 아빠는 TV를 보거나, 과제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중요한 전화 통화 중이더라도 잠시 멈추고 부엌 앞 식탁에 조르르 앉았다. 김치 비빔국수는 내 어릴 적 비 오는 날 특별한 별미였다. 비빔국수가 먹고 싶은 나는 비 오는 날을 기다리곤 했다.


엄마의 비빔국수는 특별했다. 그런데 재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탕, 조미료, 혹은 돼지고기 같은 감칠맛을 내는 여타 대표적인 식품을 전혀 쓰지 않았다. 비빔국수를 하는 집이라면 다 쓰는 흔한 조미료도 엄마는 쓰지 않았다. 엄마의 비빔국수는 뺄셈에 가까웠다. 꼭 들어가야 하는 재료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절차도 엄청 간단했다. 국수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고 쓰는 재료도 굉장히 적었다. 그런데 엄마의 비빔국수는 다른 비빔국수와 다른 깊은 맛이 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비빔국수라도 엄마의 국수와 비교하면 내겐 항상 무언가가 부족했다. 고깃집에서 시킨 국수를 한 젓가락 먹고 '엄마 게 더 맛있다.'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엄마는 그런 나를 항상 웃으면서 바라봤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새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비가 오는 날마다 가족과 함께 비빔국수를 먹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아무도 비빔국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에 가서 영상 작업을 하면서 거의 매일 오후 열한 시가 넘어서 귀가했고, 누나는 취직하고 나서는 집에 오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아빠는 맞벌이를 하는 엄마에게 부담을 지우기보다는 자신이 요리를 해서 엄마에게 대접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무도 엄마의 비빔국수를 찾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빗물이 창문에 흘러내려도 엄마는 비빔국수를 만들지 않았다. 엄마는 나와 누나에게 이번 주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었는지 하루에 한 번 꼴로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밥을 거의 먹지 않았고, 누나는 침대에 누워서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고민에 빠지다가 어느새 꿈나라로 향했다. 엄마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식들의 방에서 나와서 새벽 두 시까지 무표정하게 TV를 응시했다.


'엄마, 내일 10시까지 출근 아니야? 빨리 자.'
'현서야. 내일 아침에 먹고 싶은 거 있어?'
'안 그래도 엄마 피곤한데 아침 차리는데 힘쓰지 마. 그냥 각자 해 먹으라 해. 맨날 엄마 여섯 시에 일어나잖아.'
엄마는 웃으며 다시 물어봤다.
'현서야. 내일 아침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없어! 엄마, 좀 쉬라니까! 그러다 몸 버려 진짜.'


돌이켜보면 나는 엄마의 의지와 행동을 완전히 오독했다.


엄마는 새벽까지 TV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새벽 두 시만 되면 자연스럽게 잠들었던 어머니는 어느새 새벽 네 시까지 TV를 바라봤다. 엄마는 TV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TV에서 뚱뚱한 개그맨 둘이서 음식을 먹으면서 익살스럽게 연기를 하는 장면이 나와도 엄마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제발 들어가서 같이 자자는 아빠의 간곡한 설득에도 엄마는 잠이 안 온다면서 기어코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고집했다. 아빠는 설득하다 지쳐 안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나는 엄마가 소파에서 앉아서 선잠이 들었을 때 엄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눕힌 다음 담요를 덮어주고 거실 불을 껐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가족 모두가 먼저 잠든 새벽에, 거실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가족 모두가 놀라 거실에 나왔다. TV에는 화면조정 방송이 나오는 가운데 엄마는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엄마의 비명은 끔찍했다. 엄마의 비명은 절박함이자 참혹함 그 자체였다. 거실에 나온 나와 아빠는 5 초간 아무 말도 안 하고 얼어붙었다. 누나는 직장 워크숍 때문에 집에 없었다. 나와 아빠는 이내 엄마를 부축해서 차로 옮겼다. 보호운전과 안전운전을 강조하는 아빠는 내가 알던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액셀을 밟고 클락션을 울렸다. 다행히도 집 근처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어서 병원을 가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엄마는 세계가 찢어질듯한 비명을 연거푸 지를 뿐이었다. 


응급실은 신속하게 엄마에 대한 검사를 진행했다. 혈액검사와 CT촬영은 굉장히 신속하게 이뤄졌고, 진정제 주사를 맞은 엄마는 어느새 병원 간이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의사의 소견은 항우울제 복용으로 인한 마비성 장폐색이었다. 수액을 맞고 약 먹으면 나을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한 뒤 의사는 다른 병실 침대로 뛰어갔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먹는다고 말한 약이 항우울제라는 걸 가족 누구도 몰랐다. 아빠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응급실에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엄마의 부탁으로 두 달 전에 끊은 담배였다. 


수액 치료가 거의 끝나가는 찰나, 엄마는 잠에서 깼다. 아빠는 차분하게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엄마는 괜찮다고 말했고, 아빠는 이에 수납 처리를 하러 잠시 밖으로 나갔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병실 침대에서 누운 채로 엄마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현서야 내일 먹고 싶은 게 뭐야?'


나는 허탈함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엄마와 나는 이후에 한동안 서로 웃었다.


물을 끓인다. 냉장고에서 배추김치를 꺼내서 송송 썬다. 고추장과 매실액, 그리고 식초로 양념을 한다. 물이 끓으면 소면을 넣는다. 소면이 익으면 얼음물로 소면을 씻는다. 면이 충분히 차가워진다. 물기를 제거한다. 양념에 소면을 무친다. 오이를 꺼내서 채 썰어 올린다. 엄마가 맛을 봤다. 칭찬이 이어졌다. 나도 맛을 봤다. 엄마의 국수 맛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엄마보다 못한 거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훨씬 더 맛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옆에서 웃으면서 엄마의 국수가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누나는 국수를 먹다가 이 대화를 들으면서 피식 웃었다. 밖에 내리는 비가 창문에 부딪혀 타닥타닥거렸다. 비 오는 날, 우리 집은 김치 비빔국수를 먹는다.


어머니의 김치 비빔국수. 간단하지만 깊은 국수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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