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존재 자체가 죄인이야, 이 악마 같은 년아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벌거벗은 채로 경수를 악마라고 말하며 경수의 옷을 찢었다. 이후 자신의 속옷을 벗고 경수를 겁탈했다. 경수의 뺨을 재차 때리며 경수에게 자신의 성기를 집어넣었다.
씨발 년아. 좋냐?
남자는 경수를 강간할 때마다 너는 악마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행위가 좋은지 물을 때 경수는 악마에게 이 행위가 좋은 지 여부를 물어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처벌이라면서 처벌이 좋은지를 묻는 게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처음 경수가 남자에게 강간당했을 때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고 느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서 더는 살 수 없는 폐허가 된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 자신이 악마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강간이 반복되자 경수는 이내 그 행위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너는 이런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거야, 이 악마야.
악마는 이렇게 당하는 운명인 거야. 알겠어?
그 남자가 내가 악마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악마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존경받는 목사였다. 하지만 남자의 강간이 악마를 퇴마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그 행위에서 자신만의 쾌락을 좇았다. 마치 경수는 남자가 자신을 강간할 때의 표정에서 그의 목적이 퇴마가 아닌 쾌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수는 온몸이 남자의 땀으로 젖었다. 경수는 땀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지만.
언니!
경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언니!! 듣고 있어?
경수는 해맑은 소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경수는 눈을 감고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녀의 이야기로 빠져들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과거에 빠져있었다. 진창 같은 과거가 떠오른 것이 싫은 경수는 작게 고개를 양옆으로 가로저었다.
응. 지연아.
언니! 졸면 어떻게 해!
미안해. 그런데 다 들었어.
언니 다른 생각 했지?
아니야.
칫, 맞으면서
지연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경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 아니면 들으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를 챘다. 경수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세계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기미만 보여도 바로 경수를 불렀다. 지금처럼 눈을 감고 있어도,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눈을 감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말하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인지 항상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흥, 나 말 안 할 거야.
지연아, 진짜 언니 다 들었어.
진짜지?
그럼. 언니랑 같이 찍고 있는 영화에 대해서 말했잖아.
씨발년아, 네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알아? 그 남자가 말했다.
언니는 너무 착한 사람이야. 지연이 말했다.
지연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을 때도 그 남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경수를 괴롭혔다.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서 경수의 주의를 흩트려 놓기도 하고, 대놓고 경수를 비웃기도 했다. 꿈에도 찾아왔다. 꿈에서 남자는 벌거벗은 채로 경수를 전속력으로 쫓아왔다.행복한 하루를 보낸 날에도 어김없이 꿈에 찾아오곤 했다.길고 지난한 꿈을 꾸면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벽장 이야기를 좀 더 해줄래, 지연아? 경수는 지금도 찾아온 그 남자에 대해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벽장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야?
벽장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 좋아.
경수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지연은 신나게 말을 하려다가 다이어리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이거 써도 되는 거야? 구루님이 보이는 십자가만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언니는 지금 여기서 안 살고 밖에서 살아서 괜찮아.
진짜지?
응. 걱정하지 마. 벽장에서는 어떻게 자유로워지는 거야?
벽장은 보통 사람 한 명이 들어가면 딱 좋을 정도의 크기잖아. 딱 들어가면 이곳이 진정 나만의 공간이라는 게 느껴져. 나는 예배당도, 기도실도, 독방도 나만의 공간이라고 느끼지 못했는데 벽장 안에 들어가 딱 나만 한 공간의 어둠 속에 나를 집어넣으면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느껴져. 그리고 따뜻해서 좋아. 들어가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내 체온으로 주변 온도가 올라가. 가끔은 이불도 있으니까 따뜻하게 있을 수 있어. 따뜻해진 나의 공기를 눈을 감고 느끼다 보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그러면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는 거야.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과거이거나 미래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 될 수도 있어. 그건 그때그때 달라. 벽장이나 나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혹은 다른 세계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것 같아. 가만히 보면 벽장이 나의 상태를 보고 내가 가장 가고 싶거나, 혹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세계를 연결해준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들어가도 지연이처럼 다른 세계를 갈 수 있을까?
글쎄. 그건 해봐야 알겠지. 근데 이거 언니가 영화 찍을 때 나한테 물어볼 거 아냐? 카메라 있을 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경수는 지연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핸드폰에는 네 시간째 녹음이 되고 있었다.
언니는 역시 철두철미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언니가 말했잖아. 이번 영화 찍을 때, 같이 있을 때는 항상 녹음하거나 촬영하려고 한다고.
그래도.
난 괜찮아. 오히려 좋아. 나도 언니처럼 글을 쓰거나 영상을 찍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도 있고. 영상이 기대되기도 해. 근데 이런 영상을 찍어도 되는 거야?
이런 영상이 뭔데?
아니…. 구루님이 아닌 내 말을 찍어도 되냐는 거지.
구루께서 지연이 하는 말을 영상으로 찍어달라고 하셨어.
엥? 내가 하는 말?
응.
나를 왜? 나는 책임수행자도 아닌데.
네가 특별하시대. 구루님께서.
그런가?
당연하지.
진짜?
그럼. 우리 지연이는 특별해.
지연은 멋쩍게 웃었다. 지연의 멋쩍은 웃음은 주위를 맑게 정화하는 힘이 있었다. 그 힘 때문인지 경수도 지연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벽장 안에서 잠이 든 지연을 경수는 침대로 옮겨 벽장 안에 있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핸드폰과 몰래 설치한 거치 카메라의 메모리칩을 빼서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신진리교의 복도를 걸어도 여전히 경수에게는 남자가 떠나지 않았다. 당시의 기억을 지우고자 여러 노력을 했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기억은 더 잘 되살아났다.
이 악마야
고통도 좋아하는 씨발년
너는 악마라서 고통 속에서만 살아야 해.
남자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경수를 찾아왔다. 남자는 헐벗은 채로, 온몸이 비에 맞은 듯 물에 젖어있었다. 끈질기게 경수의 뒤를 쫓아와서 귓속에 너는 악마라고 속삭였다. 경수가 참다 참다 뒤를 돌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남자는 경수 앞에 나타났다. 노트북 모니터에 불쑥 튀어나와서 경수를 화들짝 놀라게 하기도, 영화관 스크린에 갑자기 영화 주인공 대신 남자가 연기를 하고 있기고 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몇 번씩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경수는 남자의 존재감을 무시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다고 자신을 세뇌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집중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상 속 지연의 얼굴이 빗물에 머리가 젖은 그 남자로 바뀌는 것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
경수는 자신의 몸에 그 남자의 낙인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흉터가 남아있다면 흉터를 찾아 레이저로 흔적도 없게 만들 수 있지만, 흉터 흔적이 보이지도 않아서 너무 답답했다. 경수는 몸 일부분에 아직 남자가 남아있어, 그 남자가 사라질만한 세계로 다시 탈출해야 함을 느꼈다.
경수는 비어있는 독방으로 들어가 다이어리에 정리된 촬영 목록을 정리했다. 이후 자신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영상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지연이 벽장에 들어가게 된 계기부터 벽장 안에서 보는 세계의 이야기를 면밀하게 녹음하고 촬영한 영상이었다. 벽장이라는 소재는 경수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벽장이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는 통로인 지연과 달리 경수의 벽장은 대피소였다. 이어폰만으로는 아버지의 어머니를 향한 호통, 어머니의 찢어질 듯한 고성, 그릇과 물건들이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경수는 이어폰에 힙합 음악을 크게 틀고 벽장 안으로 들어갔다. <Father Stretch My Hand Pt.1>처럼 웅장한 오케스트라 위에 경쾌한 드럼 비트와 빠른 랩이 나오면 이 세계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경수의 벽장 대피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벽장으로 들어가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가끔 몰래 들어갔지만, 혹독한 체벌이 반복되었고, 경수는 결국 벽장을 꺼리게 되었다.
지연이가 벽장 안에서 겪은 몇 가지 다른 세계 이야기를 이야기 형식으로 대본을 만든 경수는 AI에 영상 제작 의뢰를 했다. 참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120명이 넘는 스태프가 모이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배우를 섭외하고 비싼 돈을 들여 카메라와 공간 미술을 해야만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이야기를 적어 AI에 맡기면 더 완성도가 높은 영상을 결과물로 내놓았다. 제작비 300억을 넘게 들인 영상에서만 볼 수 있었던 환상적인 CG가 이제는 매달 15만 원으로 해결되는 시대였다. 이렇게 쉽게 영상을 만들고 수정하는 시대에 왜 이 남자는 기술의 힘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원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원망해도 별수 없었다. AI에 영상 제작을 맡기고 경수는 다시 지연의 방으로 돌아왔다.
지연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자면서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지연의 눈동자는 좌우로 움직였다. 의자에 앉아 지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와중, 경수는 문득 자기도 벽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수는 벽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연보다 키가 컸던 경수는 몸을 구겨야만 했다. 몸을 겨우 구겨 벽장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지연의 말대로 신진리교 독방의 어둠과도 비슷했지만, 한층 더 어둡고 짙었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일까 너무 짙게 어두워서일까, 남자도 이 공간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 점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지연의 말 때문일까? 알 수 없는 평화로움도 느껴졌다. 경수는 자신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둠에 익숙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빛이 벽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가 기어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일까. 눈앞에 비에 젖은 그 남자가 보이면 어떡할지 걱정할 찰나, 다행히도 내 눈앞에 있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지연이었다.
언니.
지연아 미안해. 내가….
위험해.
응?
언니, 지금 위험해.
내가?
어떤 남자가 언니를 죽이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