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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구십칠 Nov 15. 2020

침묵의 나선 이론과 좋은 질문에 대하여

 

 멋진 답변보다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어떠한 질문에 대하여 풍성한 답변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답변이 질문 의도에서 벗어나거나 빈약할 때에는 답변자의 문제이기보다 질문이 사려 깊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명쾌하고 재기 발랄한 답변, 그 자체보다는 그 답변을 이끌어낸 현명한 질문이 종종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TV를 잘 보지 못하는 편이지만 최근 꼬박꼬박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겼는데 바로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다. MC 유재석 님과 조세호 님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평범한 시민들과 (코로나 이후에는 특정 인물들과) 인터뷰를 하고 퀴즈를 내서 상금을 주는 프로그램인데 중간중간 시민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꽤 인상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요즘 사는 게 어때요?"라고 묻는 대신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나요? 느리게 가는 것 같나요?"라고 묻는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나요?"라고 묻는 대신 "내가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꿈이 뭐예요?"라는 뻔한 질문 대신 "내 신문기사가 나간다면 그 타이틀은?"이라고 물었던 질문도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질문하는가에 따라 시민들의 답변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아는 방송작가님의 사려 깊은 고민이 느껴지는 질문들이다.


직업 특성상 '소비자 좌담회'라는 자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할 일이 종종 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저학년 자녀가 있는 30대 주부그룹'을 모셔놓고 우유에 관한 질문을 하는 식이다. 이런 좌담회를 진행하다 보면 생각보다 좋은 답변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좌담회라는 것이 특별히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평소에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하는 것은 분명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광고를 보고 OO우유에 대한 구매 의향이 얼마나 늘었는지' 평소에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말이다.

특히, 4~5명에게 한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좌담회의 특성상 종종 '침묵의 나선 이론'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통 사회적으로 소수 의견의 집단 쪽에 속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 쪽에 속하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하지만 소수의 의견 쪽일 경우에는 의견을 말하기보다 침묵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침묵의 나선 이론’이라고 한다.

특정 질문에 대하여 앞선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답변을 하게 되면 그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이 있어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솔직하고 풍성한 답변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좌담회이다.

그래도 몇 년 동안 이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나름의 노하우는 '특정 제품에 대한 소비자 좌담회'가 아니라 '비슷한 또래 사람들과 수다 떠는 자리'로 분위기를 이끄는 것이다.

좌담회 초반부터 딱딱한 질문을 하기보다는 그냥 사는 이야기, 평소 고민들을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진행자 입장에서도 조사 전문가가 아니라 이제 막 결혼생활을 시작한 초보 남편으로서 철없는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어느새 경계심을 낮추고 왁자지껄하게 수다 떠는 자리로 변해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분위기를 이끌어 냈다면 그날의 좌담회는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직업인으로서도 일상인으로서도 답변자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멋진 답변을 이끌어내는 현명한 질문자가 되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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